◎분수같은 환희·산자의 죄의식 교차/광명 되찾은 기쁨의 노래 충만해도/새 역사는 차가운 자기비판을 요구/친일문학 거론에 “붓만 꺾으면 장땡인가” 응수도객: 한밤중 도둑처럼 온 해방, 빛의 회복이기에 시적 현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 문인들이 맨 먼저 한 일이 「해방기념시집」(1945.12) 간행이었음을 그 증거의 하나로 볼 수 없겠는가. 광복에서 이 무렵까지 씌어진 노래모음집이니까. 그러나 이 시적 현실이 시의 질적인 발전문제와 무관함에 주목할 법도 한데, 어떻습니까?
주: 환희, 그것만큼 시적으로 다루기 곤란한 것도 많지 않습니다. 해방이 시적 현실이고, 또 시의 주체이기에 시인은 다만 목소리를 빌려준 형국이라고나 할까. 뿐만 아니라 이른바 조선어가 완전히 사라진 암흑기에 시인들은 피리의 가락을 잃었던 점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시인 스스로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덤노니」(조지훈)라 할 정도였으니까.
객: 시인의 자질이나 그들의 성취도에 앞서 「시적 현실」의 분석·검토가 앞서야 한다? 그렇다면 그 「시적 현실」의 유형이 있겠고, 또 그 서열도 있을 법한데요.
주:시적 현실이 「문장」파의 거두이자 「백록담」의 시인인 정지용의 입을 빌린 장면부터 볼까요.
객: 가장 순수한 시인 아닙니까. 「오오 견딜란다 차고 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에」(「장수산1」)라고 읊으며 암흑기를 참아낸 조선 최고의 서정시인의 목소리라 제일 궁금하군요.
주: 「백성과 나라가/ 이적에 팔리우고/ 국사에 사신이 오연히 앉은 지/ 죽음보다 어두운/ 오호 삼십륙년!/ 그대들 돌아오시니/ 피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그대들 돌아오시니」).
재외 혁명동지의 환국을 기리는 노래. 임시정부, 조선독립동맹을 비롯한 재외 혁명동지란 무엇이겠는가. 바람을 먹고 들녘에 자면서 조국광복에 몸바친 무수한 애국선열의 환국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라를 찾기 위해 싸우는 일엔 원래 승패가 없는 법. 싸우지 않음이야말로 수치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분들의 존재란 벌써 혼의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 이들의 환국은 혼의 과제이기에 「허울 벗기우고/ 외오 돌아섰던/산산! 이제 바로 돌아지라」에 해당되는 것.
객: 국가의 법통 바로세우기를 재외 혁명동지의 환국에서 찾고 있음으로 요약해도 되겠군요. 우리의 주체적 역사인식이랄까. 뭔가 가부장제적이기도 하고 왕조적인 분위기이도 하고….
주: 국내 혁명동지의 죽음을 기리는 노래도 있지요. 뭔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싸움이랄까 결의같은 것이 깔려 있는….
「아아 깃발 타는 깃발/ 열 스물 또 더 많이 나붓기고/ 인민의 깃발 붉은 깃발은…/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소리는/ 모두 다 그대의 음성/ 누구가 그대인지/ 누구가 그대 아닌지/ 오직 큰 눈과 넓은 어깨/ 긴 머리카락을 날리는 그대는/ 아아 자욱한 사람 속에/ 있지 않았다」(임화, 「지금은 없는 전사 김에게」).
객: 진작부터 붉은 깃발이 등장했군요. 해방전사 추도대회에서 읊은 것 아닙니까. 추도시의 일종이기에 살아 남은 자의 죄의식이 목소리를 고조시키는 방식이라고나 할까. 물론 민족해방이 혁명동지의 목숨을 건 전리품임엔 틀림없지만 동시에 세계사의 운동법칙이었음도 사실이 아니었던가. 그 역시 시적 현실일 터인데….
주: 다음 노래가 그것에 해당되지요. 「몰래 쉬던 숨을 크게 쉬니/ 가슴이, 가슴이, 자꾸만 커진다/ 아, 동편 바다 왼 끝의 대륙에서 오는 벗이여!/ 이 반구의 서편 맨 끝에서 오는 동지여// 이 날/ 우리의 마음은 축포에 떠오르는 비둘기와 같으다」(오장환, 「연합군입성 환영의 노래」)
객: 뭔가 엉성하다고나 할까. 막연하다고나 할까. 워낙 세계사의 흐름이란 시인에겐 추상적인 것이었을 터이니까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요. 실상 제 궁금증은 따로 있는데요.
주: 알 듯합니다. 거창한 민족사나 세계사보다 가장 소박한 백성의 심정은 어떠했던가. 혹은 새 역사 창조에 대한 비전도 노래해야 하지 않았을까.
객: 최고의 모더니스트 시인이자 그 모더니즘운동의 종언을 선언한 바 있던 출중한 시인 편석촌(김기림)의 태도가 썩 궁금한데요. 적어도 그는 군소시인 모양의 센티멘털리스트가 아닐 터이니까.
주: 「검은 기관차 차머리마다/ 장미꽃 쏟아지게 피워서/ 쪽빛 바다바람 함북 안겨/ 비단폭 구름장 휘감아 보내마/ 숨쉬는 동철 꿈을 아는 동물아」(「지혜에게 바치는 노래」).
객: 과연. 모더니즘이 바야흐로 폭발하고 있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해방공간이란 「새나라」 건설이라는 것, 그것은 과거의 모든 미신과 무지를 몰아내는 계기라는 것, 기관차(과학)야말로 꿈을 아는 동물이자 미래상이라는 것.
주: 「시간과 공간이 아득하게 맞대인 곳/ 거기서는 무한은 벌써 한낱 어휘가 아니고/ 주민들의 한 이시린 미각이리라/ 얼키고 설킨 태양계의 수식의 고물에 걸린/ 날랜 타원형 하나―새로운 별의 탄생이다」(제4연)
객: 바야흐로 유클리드기하학을 넘어서는 장면이라고나 할까.
주: 장관이라면 장관이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낙천주의는 너무 지나쳤다고 볼 수 없을까. 그 기관차란 누구 것이며 어디서 온 것인가. 노래한다고 해서 맨손으로 기관차를 만들 수 있을까. 너무나 투명하여, 분석할 수는 있어도 해석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라고나 할까.
객: 아, 선생께서는 지금 「미메시스」의 저자가 호머의 「율리시즈」와 「성서」를 대비한 서양문학의 표현사를 상기시키고 있군요. 죄의식의 표현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 아닙니까.
주: 해방의 환희를 노래하기, 그것이 시적 현실의 요구였지만 동시에 죄의식을 노래하기도 시적 현실의 요구사항이 아니었겠는가. 이를 달리 산문적 현실이라 부르면 안 될까. 분석할 수 없지만 해석할 수밖에 없는 표현사랄까.
객: ….
주: 남로당계와 북로당계가 아직 표면화하기 직전, 그러니까 조선문학가동맹의 탄생 전야풍경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 봉황각 좌담회(1945.12)와 아서원 좌담회(1945.12)가 있지요. 그 중 전자는 북쪽에서 온 이기영, 한설야, 한 효, 그리고 연안서 온 김사량과 임 화, 이원조, 김남천, 이태준 등이 서울 청요리집 봉황각에서 만났던 것이지요.
객: 김남천이 사회를 맡은 「문학자의 자기비판」(「인민문학」, 1946.10) 아닙니까. 일제강점기를 살아온 문인들의 자기비판이 있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문제는 그 비판의 깊이 아니겠습니까.
주: 맞습니다. 전조선문학자대회 참석차 시골서 올라온 시인 신석정이 이렇게 읊지 않았던가.
「태양을 의론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는가고/ 가슴을 쥐어 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가슴을 쥐어 뜯지 않았느냐」(「꽃덤풀」).
객: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 여섯 해가 지나갔다」.
그렇다면 해방된 이 하늘,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우리 모두 어느 언덕 꽃덤풀에 아늑히 안겨 보아도 좋지 않겠느냐. 무슨 자기비판이 필요하랴. 이와 대칭을 이루는 것이 청년문학가협회 창립대회(1946.3)에서 시인 박두진이 읊은 「어서 너는 오느라」라 하겠군요.
주: 시적 현실에서는 그럴 수 있었겠으나, 산문적 현실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 엄정하고도 차가운 자기비판 없이 새로운 세계에 나아갈 수 없는 법. 모랄감각에 제일 민감한 것이 문학이니까. 그렇다면 자기비판의 수준은 과연 어떠했던가. 임 화의 문제제기부터 볼까요.
「내 마음 속 어느 한 구퉁이에 강잉히 숨어 있는 생명욕이 승리한 일본과 타협하고 싶지 않았는가?」
자기비판의 출발점은 바로 이 명제로 요약되는 것. 각자의 마음의 비밀이랄까 양심문제에 귀착되는 것. 따라서 아무도 이 명제 앞에 입을 열지 못했지요.
객: 그렇다면 자기비판 없는, 알맹이 빠진 좌담회였겠군요. 허풍만 치고 만 위선적 몸짓이랄까.
주: 그렇지는 않습니다. 원래 양심의 문제란 언어 이전에 속하는 것이니까. 만일 언어를 문제삼는 것이 문학이라면 당연히도 친일문학이 논의되지 않을 수 없지요.
객: 이태준이 일어로 작품을 써서 아쿠타가와(개천)상 후보까지 오른 김사량을 면전에서 공격한 사건이 진짜 문학적이다? 곧 「조선작가로 나는 최후까지 조선어와 운명을 같이한다」(이태준)에 대해 「무슨 문자로든 써야 하는 것이 문인이다」(김사량)의 명제의 충돌이 어떤 결말에 이르렀으며 또 그 의의는 무엇일까. 제일 궁금합니다.
주: 「무엇을 어떻게 썼느냐」가 문제이지 「붓만 꺾으면 장땡인가」(김사량). 이 명제는 「노마만리」를 남기면서 연안으로 탈출한 김사량다운 논리겠지만, 제가 주목하는 것은 김사량의 다음 말입니다.
「모두 앞날의 광명은 믿었던 처지로 만일 붓을 표면에서는 꺾었으나 그래도 골방 속으로 책상을 가지고 들어가 창작에 붓을 들었던 이가 있다면 그 앞에 모자를 벗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객: 아무도 없었던가요? 정작 이태준 자신도 「제일호선노삽화」(1944·9)를 썼지 않았던가. 문인들이 그토록 허망한 족속이었던가?
주: 천만에! 황순원의 「기러기」(1942), 「독짓는 늙은이」(1944), 박두진의 「배암」, 「도봉」(1942) 등이 씌어졌던 것. 그리고 무엇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가 전장에 끌려가는 한 학도병(정병욱)의 모친의 손에 의해 비단보자기에 싸여 장롱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김윤식 서울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김윤식>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