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000년이 다가오고 있다. 한세기가 끝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천년이 끝나가고 있다. 서력 기원이후 2개의 천년을 보내고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다. 천년이 바뀌는 당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은 천년 만에 한번 밖에 없는 행운이다. 우리가 새로운 천년을 맞는 동시대인이라는 것은 혈육 못지않은 동류의식을 느끼게 한다. 커다란 천년력을 함께 넘기는 연대적 공속감이 우리의 손을 맞잡게 한다. 이 2000년을 다같이 구가할 준비를 지금 하지 않으면 안된다.한해가 저물어도 사람은 마음이 들뜬다. 1백년의 세기말이면 더욱 설렐 수밖에 없다. 하물며 1천년의 세모임에랴. 천년을 살아온 듯한 환희와 천년을 살아갈 듯한 희망으로 2000년을 환호하지 않으면 안된다.
서기 0년(BC 1년). 단기로는 2333년이 된다. 이 무렵 한반도에는 3국시대가 막 열리고 있었다. 신라가 개국한 지 57년, 고구려가 37년, 백제는 18년.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은 이미 죽고 2대의 유리왕이 즉위한 뒤였지만 신라의 박혁거세와 백제의 온조왕은 아직 재위중이었다. 이 시조들이 예수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기록이 불분명한 고조선 이후 우리나라의 사실상의 유사시대는 서력기원과 거의 비슷하게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역사가 2천년이다.
그 천년뒤인 서기 1000년(단기 3333년). 고려가 건국한 지 82년째로 7대왕 목종때다. 명장 강감찬이 52세였고 해동공자라 불리던 명유 최충이 16세였다. 당시 서방 세계에서는 종말론이 한창 유행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 역사는 서력기원 이래 첫 천년이 3국과 통일신라시대였고 다음 천년이 고려, 조선왕조에 이은 대한민국 탄생의 시대라고 큰 토막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이럴 때 우리 역사에 있어서의 서기 2000년의 위치가 분명해진다.
대한민국 50여년은 새로운 천년의 준비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천년때마다 그에 앞서 새로운 건국의 초창기가 있었다. 2000년부터 시작되는 또 하나의 천년은 대한민국의 밀레니엄(millennium)이다. 밀레니엄은 천년을 뜻할 뿐 아니라 예수가 재림하여 지상에 평화의 왕국이 천년동안 이어진다는 지복천년을 말하기도 하고 황금시대를 일컫기도 한다. 대한민국으로서는 그런 천년이다. 천년단위의 우리 역사의 리듬이 그것을 기약해 준다. 우리 국민은 이것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런 겨레의 명운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자면 우선 우리는 하나의 이정표부터 세울 때다.
영국에서는 서기 2000년을 기념하는 대형 구조물 건설에 착수했다. 런던의 국회의사당 맞은편 템스 강변에 「밀레니엄 휠」을 세우는 것이다. 높이가 151m나 되는 수레바퀴 모양의 회전 전망대로, 60개의 전망실에서는 휠이 한바퀴 도는 20분동안 런던 시가지를 한눈 아래 조망하게 된다. 이 휠은 앞으로 파리의 에펠탑이나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과 겨루어 런던이 세계에 자랑할 새로운 명물로 등장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1989년 혁명 200주년때 여러 조형물들을 설치했기 때문에 오는 2000년에는 대대적인 축제행사에 주력하기로 하고 문화성 산하에 2000년 준비위원회를 구성해놓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나라의 이미지로 내세울 만한 상징적인 조형물이나 구조물이 하나도 없다. 아무 얼굴도 없는 나라요, 그래서 면목이 없는 나라다. 작년에 광복 50주년을 맞으면서도 그동안의 자주·자립의 성과를 과시할 기념탑같은 상징물 하나 세울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 이제 마침 우리에게는 서기 2000년이라는 호기가 와 있다. 2000년을 기해 우리민족 역량의 금자탑을 실물로 건립하자는 것이다. 지나간 우리 민족사의 위광과 다가올 천년의 비전을 담은 모뉴멘트를 세워 겨레의 노고를 위로하고 겨레의 진운을 고취할 대대적인 축전과 함께 제막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천년의 의미를 표징하는 랜드마크가 될 것이고 나라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하는 탑이 될 것이고 국민의 일체화를 다짐하는 일석주가 될 것이다.<본사 논설고문>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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