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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 연구 100년」 한·중·일 국제학술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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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 연구 100년」 한·중·일 국제학술회의

입력
1996.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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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호태왕” 명칭 통일키로/문제의 「신묘년기사」 싸고 한·일학자 열띤 논쟁 동북아고대사의 열쇠가 담긴 광개토왕릉비문을 올바로 해독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장에서 「광개토호태왕비 연구 100년」을 주제로 열린 「제2회 고구려국제학술대회」에서도 한일 양국의 학자들은 열띤 논쟁을 거듭했다.

 고구려연구회(이사장 서길수 서경대 교수) 주최로 11일까지 계속되는 행사에는 일본의 스즈키 야스타미(영목정민) 국학원대 교수, 하마다 고사쿠(빈전경책) 구주대 교수, 이성시 와세다(조도전)대 교수, 다무라 고이치(전촌황일) 청산학원대 교수, 중국의 서건신(슈 지안신) 사회과학원 세계역사연구소 교수, 위존성(웨이 쑨쳉) 길림대교수, 왕건군(왕 지안쿤) 길림성 문물고고연구소연구원 등 각국의 권위자들이 참석, 1884년 일본 육군참모본부에 의해 본격 해독이 시작된 이래 광개토왕릉비 연구사 100년의 총정리에 나섰다.

 첫 날에는 문제의 「신묘년기사」(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나이위신민…) 해석을 둘러싸고 또 한 번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첫번째 주제발표자로 나온 스즈키 교수는 『신묘년조의 주어는 왜』라며 『한국학자들은 정인보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비문의 글자를 바꾸어 놓거나 어구를 보충해서 고구려 또는 백제를 주체로 해석했지만 이는 성립할 여지가 전혀 없다』고 일본학계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는 신묘년기사를 「그런데 왜는 신묘년 이래로 □해를 건너서 백잔을 격파하고 신라를 □□하여 신민으로 삼아버렸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국학자들은 비문의 전체 주어가 고구려(광개토호태왕)라는 점을 지적, 상이한 해석을 제시하며 반박했다. 림기중동국대교수는 100여년동안 한국 중국 일본 대만의 학자들이 논쟁해온 비문해석의 여러 쟁점을 종합정리한 뒤 문제의 부분을 「(고구려가) 신묘년에 왜가 와, 사물(사수)을 건너서 쳐부수었다. (그리고) 백잔□□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서길수이사장은 「북한에서의 광개토호태왕비 탁본과 비문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발표,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바다를 건너 백제를 격파하고 □□□나를 신민으로 삼았다」(김석형),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고구려왕은) 패수를 건너가서 백잔을 치고 동쪽으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손영종)는 북한학계의 해석을 소개했다.

 이번 회의에선 고구려연구회의 제안으로 「광개토왕」(한국·일본), 「호태왕」(중국)등 나라마다 각기 달리 사용해온 명칭을 「광개토호태왕」으로 통일해 사용키로 했다.

 학술대회에서는 비문 해석 외에 광개토왕릉비의 서법과 세계관, 당시 고구려사회와 문화, 고구려왕릉과 묘제등 다양한 주제의 논문 20여편이 발표된다.<변형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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