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꾸 덩치는 커지고 마음은 잘아진다. 신대심소 증상이 나라는 차츰 부강해지면서도 국민정신은 날로 가난하게 만든다.군자라는 것이 있었다. 학식과 덕행이 뛰어나 인격이 훌륭한 인물을 일컫는다. 옛날 중국에서는 이런 인물들이 높은 벼슬에 올라 나라를 다스렸다. 「논어」에는 군자란 말이 100여군데나 나온다. 학덕을 겸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유가의 목표였다. 인의의 덕목을 갖춘 지식계급이 정치를 맡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고 이 사상은 우리나라도 지배해 왔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군자가 잘 안보인다. 시대가 달라지지 않았느냐고 하겠지만, 군자 대신 다른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어느 시대에나 군자는 있어야 옳다. 군자가 거북하다면 대인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대인도 예부터 군자와 거의 동의어로 있어온 말이지만 듣기에는 현대어에 가깝다.
우리 시대는 인간상의 모델을 잃었다. 준거가 되고 귀감이 될 인간형을 모른다. 자칫하면 이 배금주의시대에 돈 잘 벌기만 하는 사람이 모형이 되기 쉽다. 그것이 아니라면 어떤 사람을 본받아야 할지 막막하다. 어떤 사람이 인물다운 인물이며 어떤 사람을 궁극적 지향점으로 하는 사회인지 알지 못한다. 모범을 잃었으니 푯대가 없고 사회의 지도적 모럴이 없다. 규준이 무너지게 마련이다. 왕년에는 그 인물의 전범이 군자요 대인이었다.
「맹자」에서는 대인을 「자기를 바르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라 하여 그 감화력을 깨우쳐주고 있다. 「채근담」에도 「대인을 경외하면 저절로 함부로 하는 마음이 없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대인이 우리 곁에 필요한 것이다.
군자나 대인에 반대되는 사람이 소인이다. 소인은 현덕을 갖춘 군자에 비해 품성이 천하고 사욕이 많고 옹졸하여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면 군자나 소인은 실제로 어떤 형의 사람을 말하는가. 「논어」 뿐아니라 사서오경은 모두 군자학의 교본이나 다름없다. 이에 따르면,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 군자는 의롭게 살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편안하게 살 땅을 생각한다. 군자는 중정의 길을 걸어 천명을 기다리지만 소인은 위험한 책략으로 요행을 기다린다. 군자는 욕심이 없어 항상 마음이 편안하고 소인은 항상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군자는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 묻고 소인은 모든 책임을 남에게 묻는다. 군자는 궁할 때가 있어도 길을 잃지 않지만 소인은 궁하면 도를 벗어난다. 대인은 마음에 숨기는 것이 없고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으며 순진하여 항상 갓난아기의 마음이다. 소인은 가난하면 구차하고 부자가 되면 교만해진다.
듣고 보면 오늘의 우리 사회는 대인 대신 소인만 가득한 것 같다. 정직하고 어질고 순진한 사람은 비웃음거리나 되는 세상이다. 도의는 팽개친 채 이욕에 눈멀고, 시기하고 질투하느라 마음은 항상 편치 않고, 모두 남의 잘못 탓이지 자기 잘못은 하나도 없고, 실속없이 거들먹거리거나 돈주머니를 짤랑대며 허세나 부리고 하는 것이 모두 소인배의 행태다. 정치판에서도 의리없이 배신이 예사고, 국리보다는 사리가 앞서고, 절조없이 아무 정권에나 빌붙고 하는 것이 소인배의 작태다. 어디에도 대인의 대의와 금도를 찾기 어렵다. 가히 소인공화국이다.
덕은 「큰 덕」자다.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어서도 덕인이 대인이요 덕치가 대치다. 그런 덕이 메말랐다.
제갈공명의 「출사표」에는 전한이 흥한 것은 군주가 소인을 멀리했기 때문이요 후한이 망한 것은 소인을 가까이 했기 때문이라 했다. 소인은 나라의 흥망을 좌우한다.
어제의 군자가 오늘의 우리 사회에 나타나면 소인을 교화시키기는 커녕 소인에게 추방당할 것이라고 걱정할는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군자 또는 대인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신군자는 새로운 국민상이기도 하고 새로운 정치인상이기도 하다. 신군자들이 지배하는 대인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본사 논설고문>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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