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올림픽이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성적이 예상보다 저조하게 나타나 국내 한국인의 가슴을 안타깝게 한다. 올림픽만큼 세계의 최다수 국가들이 참여하여 메달 수에 따라 체력에 의한 국력을 지표화하는 데도 없는 것 같다. 우리나라도 남북이 나란히 참여하였고, 남한만도 애당초 세계 5위를 목표로 한다고 공언했었다. 그러나 선수들의 체력이나 정신력에 이상이 생겼는지 예상 외로 부진한 성적을 나타내자 「스포츠 한국」의 위상에 적신호를 보게 된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 이러한 현상을 왈가왈부하려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스포츠에 탐닉하지도 외면하지도 않는 객관적 입장에서 다른 분야와의 전체상을 한번 검토해 보고 싶다.지금 우리는 세계화를 부르짖고 있는데 과연 얼마나 세계성을 갖추고 있는 것일까? 노벨상을 새삼 들먹거리고 싶지 아니하지만, 의학, 경제학, 자연과학의 학문분야와 문학 같은 예술분야, 그리고 평화상같은 사회봉사에서 아직 한국인이 한번도 수상하지 못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체육에서 우리보다 못한 일본도 이미 몇개의 노벨상을 타지 않았는가.
○문화성숙도 자성
수년 전 노벨의학상 추천위원인 외국학자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기자가 『한국에서는 언제 노벨상이 나올 수 있는가』라는 우문을 던졌을 때 『학문을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진리탐구 자체를 위해 할 때』라는 무서운 현답을 주고 간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학문, 예술분야에서 세계성이 나타나려면 무엇보다 진선미의 지고한 가치 자체에 몰아적으로 헌신하는 연구자층이 두껍게 형성되어야 함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과연 학문, 예술, 철학, 평화의 부문에서 세계에 자랑할만한 한국인이 얼마나 있을까? 한국인은 「제2의 유대인」으로 불리지만 이 점에서 유대인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스포츠는 체력으로 직접 나타내는 것이지만, 학술과 사상은 세계인이 알 수 있는 외국어로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역량을 직접 표현하는 음악, 미술같은 예술분야보다도 상대적으로 어려운 것 같이 보인다. 문학만 하더라도 작품의 내용 수준은 차치하고라도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것 자체에서 난관에 부딪치고 있다. 그렇다고 번역만 잘 되면 한국문학도 저절로 세계적 수준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은 위험하다. 노벨상 후보자였던 재미작가 김은국씨(Richard Kim)도 한국작품이 인류적 문제와 씨름하는 강도가 아직 약하다고 논평하는 것을 귀담아 들은 바 있다.
어쨌든 이러한 세계성을 실현시키는 힘을 문화력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아직도 세계적 문화력에서 상당히 뒤떨어져 있다고 냉정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위에 지적한대로 학문, 윤리, 예술을 치부나 입신출세의 방편으로 생각하지 아니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교육현실이 보장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지육, 덕육, 체육의 순서로 골고루 교육했는데, 이런 면에서 과연 전보다 질적으로 나아지고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우리가 체육을 통한 세계성의 가능성과 한계성을 극명하게 보면서, 이번 기회에 한국인의 세계성에 대한 총체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너무 일찍 비만증에 걸려 체력이나 정신력이 모두 떨어진 것 아닌가 되살펴 보아야 한다. 세계화의 구호만 외친다고 세계성이 저절로 높아가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작은 규모의 나라에서 세계성을 유지해 나가려면 질적인 면에서 세계적 수준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계발해 지녀야 한다.
○너무 이른 비만증
더 이상 「이상한 민족」이 아닌, 세계시민으로서 떳떳하게 세계문화의 주체역할을 할 수 있는 제반여건이 사회적으로 갖추어져야 한다. 경제적으로 이만큼 부유해졌으면 학문과 예술을 통한 문화력도 함께 성숙되어야 한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의 벽이 높다는 것을 실감하는 이상으로 세계무대의 각 분야에서 계속되고 있는 정신올림픽에서 한국인이 세계적 현존을 주장해 나가려면 한국인 각자가 보다 발전하고 성숙되어야 한다.
문화와 체육을 함께 묶어 문화체육부로 둔 나라도 못 보았고, 학술원이 교육부 산하의 왜소한 기관으로 있는 것도 문화국가의 차원에서 저급한 감을 면치 못한다. 간단없이 계속되는 체육올림픽과 정신올림픽에서 한국인의 세계성을 냉철히 되돌아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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