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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빈곤(김성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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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빈곤(김성우 에세이)

입력
1996.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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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의 변혁운동은 철학의 빈곤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마르크스의 경제학관계 최초의 저서인 「철학의 빈곤」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책은 프랑스의 사회주의자인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을 반박하기 위해 쓴 것이다. 프루동이 이 책에서 사회의 모순 타파는 혁명대신 개량주의 방법을 통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그런 식으로 빈곤이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철학의 빈곤이라고 맞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어디에도 철학이 없다. 사회가 빈곤에서 탈피하여 차츰 풍요해지면서 철학은 더욱 빈곤해진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노동자는 노동에 상당하는 임금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일을 해서 부를 만들면 만들수록 점점 그 부로부터 버림받아 가난해진다고 주장했다. 이 어법을 흉내내면 우리 사회는 부자가 되면 될수록 점점 그 부 때문에 철학이 가난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가난했던 시절에는 부자가 되는 것 그 자체가 철학일 수 있었다. 배고프면 먹을 것밖에는 아무 생각이 안난다. 이것이 빈곤의 철학이다. 이제 어느만큼 부자가 되어 배가 불러졌으면 생각을 좀 해야 한다. 그런데도 배 고플 때 배만 움켜쥐던 습성으로 이번에는 부른 배만 두들기며 오히려 더 아무 생각을 안한다. 이것이 철학의 빈곤이다.

생각을 좀 해보자.

「당신은 무엇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느냐」고 물었을 때 선뜻 대답할 수 있는 국민이 몇이나 될 것인가. 머뭇머뭇하다가 대개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돈 버는 것은 인생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무엇 때문에 돈을 버느냐」는 질문에 다시 대답해야 한다.

인생관이 없다. 이 인생관이 바로 철학이다. 철학이 없는 인생은 무목적적이요 맹목적이다. 그런 눈 먼 인생들만 모인 세상은 해가 아무리 떠도 캄캄하다. 돈을 아무리 벌어도 가난하다.

인생관 뿐이 아니다. 국가관도 없고 세계관도 없다. 국민 개개인 뿐이 아니다. 기업에도 철학이 없고 정치에도 철학이 없다. 그래서 국민들은 정신적인 공황상태가 되고 기업은 부도덕해지고 정치는 국가경영의 지도이념을 잃었다. 철학이 없는 사회는 등뼈가 없는 사회요 중심이 없는 사회다. 바람이 불면 쓸리고 물결이 치면 출렁이는 사회다. 불변항상의 심지없이 삶의 질도 사회의 질서도 국가의 강성도 없다.

철학은 반드시 높은 다락위에 얹힌 난삽한 정신인 것은 아니다. 철학의 시작은 생각이다. 생각이 있는 곳에서 철학은 싹튼다. 우리 국민은 생각에 익숙지 않다. 그저 돈 벌 생각, 돈 쓸 생각 말고는 골치아픈 생각을 하기 싫어한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인간의 사유를 기계화시켰듯이 경제개발이 우리 국민의 사고를 더욱 단순화시켰다.

사뮈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뽀조가 모자를 써야 생각하기 시작하는 럭키에게 모자를 씌워주면서 『생각해! 이 바보야, 생각해!』 하고 고함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사고결핍시대에 대한 경종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럭키의 모자가 필요하다. 생각하기 국민운동이라도 벌여야 할 때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이런 자신에 관한 질문부터 시작해 꾸준히 자신에게 묻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칸트가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즐겨 한 말은 『여러분은 나한테 철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철학적 사고는 아무래도 학교의 철학교육에서 훈련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고등학교가 철학을 선택과목으로 채택하고 있는 정도지만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철학이 고등학교의 필수과목이 되어 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뉴저지주의 몬트클레이어대학에 부설된 IAPC(어린이를 위한 철학연구소)가 유치원에서부터 철학을 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전국에 보급시키고 있고 ICPIC(어린이 철학교육을 위한 국제학회)도 조기 철학교육 운동을 확산중이다.

이 변혁의 시대에 철학의 빈곤으로 고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도 어린이 때부터의 철학교육에 관심을 가질 때다.<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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