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김여정 「게」와 강은교 「월명이 던진 곡조」(시평)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김여정 「게」와 강은교 「월명이 던진 곡조」(시평)

입력
1996.07.23 00:00
0 0

◎두편의 게에 관한 명상이번 달 문학지에는 공교롭게도 게를 소재로 한 시 두편이 동시에 실렸다. 김여정의 「게」(「현대문학」)와 강은교의 「월명이 던진 곡조」(「문학사상」)가 그것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김광규의 「어린 게의 죽음」(1980)을 떠올린다. 「달려오는 군용트럭에 깔려/길바닥에 터져 죽」은 게, 그 게를 통해 시인은 폭압적 군사정권에 의해 최소한의 생각의 자유도 압살당한 상황을 압축적으로 재현했었다.

지금은 군사정권이 심판받는 시대. 그러니, 길바닥에 터져 죽을 게는 없을 것인가? 어쨌든 게는 여전히 옆걸음을 친다. 게의 그것은 앞만 보고 걷는 보행과 대비되어 생각하는 걸음의 표상으로 떠오른다. 물론 게의 생각은 황지우가 「게 눈 속의 연꽃」에서 보여주었듯 종종거리는 생각이다. 종종거리는 생각은 사건화하지 못한 생각, 생각의 울타리에 갇혀버린 생각이다.

그 종종거리는 생각이 김여정에게서는 「역사의 사막 위를 허적허적 걷」는 꼴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막이 은유한 적요 속의 모래사장에는 둥근 달이 떠 있어 그 곳을 「깊고 푸른 밤」으로 만들어준다. 깊고 푸른 밤에 둥근 달은 아이를 품은 어머니로 변용되고, 다시 태아는 둥근 지구가 된다. 게 한 마리 걷고 있는 달빛 바닷가는 지구의 새로운 부활이 마악 시작되기 직전의 전야다. 은밀한 사건에 대한 기대로 시는 둥근 달처럼 꽉 차고, 은밀한 웃음을 흩뿌린다. 게가 제 안에 품었던 「천만의 알」을 까듯.

강은교의 게는 행동으로 외현되지 못한 생각의 슬픔을 그린다. 그 시에도 둥근 달이 은은히 빛을 발한다. 제목의 「월명」은 「제망매가」를 지은 월명사가 아니라, 말 그대로 달 밝은 저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밝은 달도 해보단 못하다. 이 저녁에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지만 해는 바닷 속으로 잠긴다. 시인은 하얀 달과 붉은 해가 연출하는 기이하고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는다. 하얀 달은 붉은 해의 몰락을 따라 덩달아 침몰하고 싶다. 시인은 옛 동화에서처럼 피리를 분다. 그러나, 종종거리는 생각은 황급히 집으로 돌아가야 함을 깨닫는다. 게는 재빨리 집속으로 사라진다. 이 잡념들은 우리를 도대체 놓아주지를 않는다. 「다음날 떠나기 위해」 「우리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언제나 되풀이되는 출분과 귀환. 날마다 되풀이되는 이 헛헛한 슬픔. 하얀 달은 그 슬픔의 은유다.

세상이 바뀌었어도 게의 횡보는 변함이 없다. 시인의 몽상도, 그의 깊은 슬픔도 여전하다. 우리는 결코 가나안에 이르지 못할 지니.<정과리 문학평론가·충남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