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거경위/안기부,송신지호텔들에 몽타주 배포/지난 3일 송고불발틈타 직원이 신고/부인하다 “비 현지실사”에 자백지난 3일 서울 플라자 호텔 5층 비즈니스 센터. 낮 12시가 지나자 간첩 정수일이 나타나 중국 북경(베이징)에 팩시밀리 송고를 요구했다. 동료 1명과 함께 근무중이던 K양(24)은 그의 용모와 제시된 전화(팩스)번호를 보고 순간적으로 안기부에서 신고를 요청한 인물임을 직감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팩스번호의 한 숫자를 빠뜨려 알려주는 바람에 송신이 계속 불발됐고 이 틈을 타 K양은 기민하게 호텔 외곽 경비실에 연락했다. 곧 경비요원 2명이 올라와 경비실로 동행을 요구했고 정은 순순히 응했다. 경비요원들은 그때까지 그를 단순한 마약사범 정도로 생각했다.
신고를 받은 소공파출소 경찰 3명이 출동했고 30분뒤에 안기부 수사관들이 도착, 정은 남파 12년만에 검거됐다.
정의 검거는 이처럼 북한 공작당국의 허술한 교신 체계가 단서가 됐다.
안기부에 따르면 정은 그동안 편지 뒷면에 암호를 기록한 은서를 통해 중국 북경, 심양등지의 공작거점과 교신해 왔다. 그러다가 지난 2월 정은 대량 정보의 신속 전달을 위해 앞으로 팩시밀리를 이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정은 보안상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보계에서 팩스는 보안 유지가 어렵기 때문에 금기 사항이다. 우리 정보당국에서도 팩스 사용은 곧 내용 유출이라는 판단 아래 이를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안기부 관계자는 『북한 해외공관의 공작 거점은 상당 부분 파악돼 있다』며 『이들 지점과 한국간 전화·팩스 교신은 대부분 놓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단지 공중전화 등이 이용될 경우 교신자 추적이 어렵다.
정이 우리 수사망에 걸린 것도 팩스를 이용하기 시작한 3월부터. 안기부가 북한 공작원의 거점으로 파악하고 있는 중국 북한대사관내의 특정 전화(팩스)번호에 서울발 송신이 집중 포착된 것이다. 프레지던트, 조선호텔 등 특급 호텔의 비즈니스 센터가 송신지였다.
안기부는 이들 호텔 관계자들에게 전화(팩스)번호를 일러주며 신고를 요청했고 정은 프레지던트 호텔 CC TV에 모습이 잡혔다. 화면과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지난달 초에 몽타주가 작성, 배포됐다.
정은 검거 직후 한동안 자신이 필리핀 국적의 단국대 교수임을 내세우며 완강하게 간첩활동을 부인했다. 우리측은 정이 살았다고 주장한 필리핀 민다나오 지역의 사투리를 조사, 아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등의 방법으로 그를 추궁했다. 레바논 필리핀 등지에 대해 현지 실사를 벌이겠다는 얘기에 정은 손을 들어 버렸다.<김병찬 기자>김병찬>
◎누구인가/중 외교관 생활하다 63년 입북/교수재직하며 김일성 아랍어통역 활동/평양에 처와 세딸… 사위들 모두 엘리트
정수일은 34년 중국 길림성 연길현 지신구 대흥촌에서 아버지 정태극씨(57년 사망)와 어머니 노성녀씨(약 83세)의 3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은 연변소·중학교와 북경대 아랍어과를 거쳐 55년부터 3년간 이집트 카이로대학 아랍어문학과에 유학했다. 58년부터 5년간 모로코주재 중국대사관에서 2등서기관으로 근무한 그는 중국정부의 소수민족 차별정책에 불만을 품고 63년 가족과 함께 평양으로 귀환했다.
정은 평양 국제관계대학과 평양외대 동방학부 아랍어과 교수와 학과장으로 재직하면서 김일성의 아랍어 통역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74년 9월 북한 노동당연락부에 소환, 간첩 기초교육과 사상교육을 받으면서부터 비밀유지를 위해 중국 길림성의 친지들과 일체 연락을 끊었다.
수차례의 신분위장과 2차례에 걸친 국적세탁 및 간첩활동 과정에서 정은 79년 레바논 입국시 사용한 이철수등 무려 8개의 가명을 사용해 온 것으로 수사결과 드러났다.
정은 단국대 사학과 조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이슬람학회」 및 교내「동서사학회」활동에 열성을 보였으며 「신라·서역교류사」 「세계속의 동과 서」 등 다수의 논문, 저술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또 아랍문화권의 전문가로서 중앙일간지와 TV등에 수차례 기고 또는 출연했다.
정의 집인 평양의 모란봉구역 대동문동 아파트에는 모란봉극단의 안무지도자인 처 박광숙(61)이 살고 있다. 정은 장녀 미란(33·평양시당 선전국홍보원), 차녀 달미(31·중앙통신사 기자), 3녀 소나(30·무역회사 근무)등 3명의 딸을 두었다. 첫째 사위 김유성(33)은 김책공대를 졸업하고 평양자연과학원 연구원으로 재직중이고 둘째 사위 김철(33)은 「28촬영소」 배우로 활동하는 등 사위들도 북한의 엘리트들이다.
정이 국내침투후 신분위장을 위해 결혼한 윤모씨(45·간호사)와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다. 그는 86년 아시안게임당시 아랍어 통역강사로 함께 일하던 한국외대 아랍어 강사의 소개로 윤씨를 만나 88년 결혼했다.<최윤필 기자>최윤필>
◎침투·활동/4년 간첩교육 79년 레바논 투입/학위받고 83년비거쳐 84년 입국/74회 정보보고… 4차례 입북도
70년대 북한의 남조선출신자 및 중국귀환자 중 공작원을 발탁, 활용한다는 계획에 따라 선발된 정수일은 4년5개월간의 간첩기본교육을 받고 79년 1월 레바논에 투입됐다. 정의 뛰어난 아랍어 능력과 아랍인과 유사한 신체적 특징 등이 발탁 이유였다.
그는 그해 2월 실존인물 무하마드 깐수(당시33세) 명의로 레바논 국적을 취득, 베이루트의 아랍대 대학원과 튀니지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83년 4월 필리핀에 입국, 2차 국적세탁을 한뒤 82년 말레이시아대학에서 한국어강좌를 담당하던 국내 김모교수와의 친분을 이용, 연세대 한국어학당 입학허가서를 받아내 84년 4월 유학생비자로 입국했다.
정은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88년 서울 모종합병원 간호사 윤모씨(45)와 위장결혼을 하고 단국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전임강사를 거쳐 90년 2월 조교수로 승진했다.
정은 올 1월까지 74회에 걸쳐 은서와 암호숫자로 수집한 국내 정세분석과 정치·경제·군사동향 등을 중국의 거점을 통해 평양에 보고했다. 그는 난수표와 암호문 외에도 에밀리 브론티의 소설 「폭풍의 언덕」등 책의 내용을 번호로 표기하는 방법을 활용하는등 치밀한 수법을 동원해 정보를 유출했다. 또 올 3월부터는 수집한 정보를 다량으로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 팩시밀리를 이용,▲한미 미사일회담 ▲150㎜ 자주포화력 ▲미정찰기 도입 등의 정보를 모두 6차례에 걸쳐 송출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신분노출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해 발신인을 본사, 혹은 조혁(조선혁명의 약칭), 루이스, 왕청 등의 가명을 교대로 사용했고 대통령을 회장, 총리를 부회장, 국회를 교회, 북조선은 본점, 남한은 대리점 등으로 표기했다. 정은 아랍어, 중국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한 외국어실력과 특이한 경력, 오랜 외국생활로 몸에 밴 특유의 매너로 정계·학계·언론계 등 각계 전문가들과 폭넓게 교류하면서 간첩활동을 해왔다.
국내활동을 시작한 뒤인 87년, 90년, 92년, 95년 등 4차례에 걸쳐 입북했음이 확인됐다.<최윤필 기자>최윤필>
◎사건특징/국적세탁 암약 첫사례/임무도 저명인사들과 교류 고급정보 수집
정수일간첩사건은 기존의 간첩사건과 여러 면에서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우선 이 사건은 국적세탁을 통해 외국인으로 위장, 암약하다 적발된 최초의 간첩사건이란 점에서 충격을 던져 주고 있다. 사망 또는 행방불명된 일본인 신분을 도용한 간첩사건은 더러 있었지만 국적을 지능적으로 세탁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으로 북한의 침투경로가 다국적화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정은 테러와 파괴가 주임무인 「사회문화부」소속 간첩과는 달리 대남정보수집이 주임무인「대외정보조사부」소속으로 고도의 전문성과 지적능력을 지닌 인텔리 간첩이다.
정은 중국어와 아랍어는 물론 영어 일어 독어 불어등을 자유롭게 구사, 변신에 능했다. 국내 잠입이후 신분을 속이기 위해 간호사인 윤모씨와 위장결혼한 뒤에도 일부러 우리말을 어눌하게 구사, 부인도 정이 간첩인 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정의 임무도 지하당 구축활동이나 유언비어를 날조하는 전형적인 간첩임무보다는 12년동안 정·관계와 언론등 사회각계 저명인사 및 전문가들과 쌓은 친분관계를 이용 고급정보의 수집에 한정됐다.
정은 보고방법에서도 여타 간첩들과 달랐다. 팩시밀리를 이용, 시사성 있는 정보를 대량으로 신속하게 보고했다. 정은 또 기존 간첩들이 고정간첩이나 무인포스트를 통해 공작금을 지원받아 온 것과는 달리 교수라는 신분을 이용, 검거당시 1억여원의 은행예금을 보유하는 등 합법적인 토대를 자력으로 구축했다.<조철환 기자>조철환>
◎일문일답/체념표정 “혐의 모두시인”/현아내는 간첩활동 사실 몰라
정수일은 22일 하오1시 서울지검으로 송치되면서『안기부가 발표한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고 간첩행위 사실을 시인했다.
20일동안 안기부에서 수사를 받은 정은 서울지검 구치감에 수감되기 직전 태연하면서도 체념한 표정으로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안기부 수사결과 발표를 모두 시인하느냐.
『모두 시인한다』
―부인이 간첩활동을 한 것을 알고 있느냐.
『(북한의)부인은 (내가)대남활동을 하고 있다고만 알고 있을 것이다. 현재의 아내는(내가) 필리핀인 것으로 알고 있을 뿐 간첩활동을 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
―북한측에 보고는 팩시밀리로 했는데 지령은 어떻게 받았나.
『무전으로 받았다』
―최초의 보고는 언제 어떤 내용이었나.
『84년 유엔군 경비에 관한 것이었다』
―모두 몇차례나 보고했나.
『60여차례로 기억한다』(안기부는 기자회견에서 80차례로 발표했다)
―접촉인사들은 누구였느냐.
『주로 동료 교수등 학계인사들이었다』
―정치인, 언론계인사들은 없었나.
『별다른 접촉이 없었다』
―재야운동권과의 접촉은.
『별로 없었다』
―정보수집 방법은.
『일간지를 이용, 국내 동향을 종합분석하고 출판물 등도 활용했다』<김승일 기자>김승일>
□주요간첩사건 일지
▲69.1.31=판문점을 통해 위장 귀순한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 이수근 간첩혐의로 체포.
▲69.5.14=당시 공화당 김규남 의원, 북한을 방문해 노동당에 입당한 혐의로 구속.
▲82.7.1=서독에 위장 망명한뒤 귀순한 김진모 등 간첩 3명 검거.
▲82.9.10=전직 공무원과 이화여대 교수 등이 포함된 고정간첩단 29명 적발.
▲86.9.4=이병설 서울대교수, 11년동안 암약한 혐의로 구속.
▲92.9.7=전 민중당 공동대표 김락중, 36년동안 암약한 혐의로 구속.
▲92.9.29=거물급 공작원 이선실이 주도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조직원 58명 구속.
▲94.6.16=대학강사가 포함된 조선노동당 지하당 「구국전위」조직원 10명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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