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대서 익힌 한국어 유창/남한기업인 상대 제실력 발휘웬 당 야오씨(54·사진)는 호치민시(구 사이공)에서 가장 유능한 한국어 통역인이면서 질곡으로 점철된 베트남 근세사를 닮은 인생역정을 가진 인물로도 유명하다. 베트남 사람들이 체구가 작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웬씨는 너무 깡말라 첫 눈에 베트콩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그는 베트콩 출신이다. 종군기자로 활약했기에 베트남전동안 미국인이나 한국인을 겨냥해서 총을 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전쟁 막바지에는 단신으로 2,000㎞에 이르는 비밀 정글 도로인 「호치민 루트」를 타고 하노이에서 사이공으로 잠입, 구치터널을 종횡하며 월맹군을 독려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그런 그가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찾아오는 「자본주의자」들의 말을 통역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영어통역은 하루에 25달러를 받지만 한국어통역은 50달러. 최근에는 베트남에 투자하는 한국기업이 늘어나 한국어를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많아졌다. 그 덕에 웬씨는 저녁에는 한국어 개인지도도 한다.
수입도 만만찮다. 적은 달은 500달러, 많을때는 한달에 2,000달러도 번다. 베트남에서 대졸 사원 초임은 60달러, 장관 월급도 200달러에 불과한 사실에 미루어 웬씨가 「자본」을 얼마나 많이 벌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웬씨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준 곳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북한이다. 63년, 북한유학생으로 뽑혀 김일성대 조선어문학부에 들어갔다. 연수를 마치고 정식입학한 후 69년에 수석으로 졸업했다.
베트남에서 온 당간부와 김일성의 통역을 전담했고 대학조교로 남으라는 제의도 받았지만 『전쟁중인 조국을 외면할 수가 없어』 그해 귀국했다. 72년에는 종군기자로 호치민시에 파견됐으며 그때 남동생이 월남군 해군중위라는 사실을 알았다.
베트남 최남단 밍하이성의 세무청장이던 아버지는 54년 프랑스와 휴전후 분단국이 되자 맏아들인 웬씨만 데리고 월북했다. 남에는 어머니와 남동생, 여동생 3명이 남아있었다. 웬씨는 동생을 전향시키려 했지만 지역책임자가 말렸다. 동생은 결국 종전 직전에 군함 한척을 끌고 투항했다. 그 덕에 수용소 재교육을 1년에서 3개월로 단축할수 있었다. 웬씨는 종전후 메콩강 지역방송국 부국장과 메콩강 수출입회사 호치민 지사장을 거쳐 94년 은퇴했다.
웬씨는 한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했지만 미움을 사고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 다만 『한국사람들은 너무 성질이 급하다. 베트남에서 베트남인을 때리는 사람은 한국사람뿐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말은 않지만 잘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뼈있는 충고를 건넸다.<호치민=서화숙 기자>호치민=서화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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