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못준 지나친 절제최인훈 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는 우리 민간의 아기장수 전설을 바탕으로 한다. 그 핵심은 모진 핍박 속에 구원을 갈망하던 민중이 막상 구원자가 나타나자 그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예수의 생애를 비롯한 여러 구원설화의 공통구조이다. 그러나 구체적 내용은 아기장수의 경우가 훨씬 비극적이다. 분명 구원자인 줄 알지만 그로 인한 당장의 고통을 못 이겨 벌어지는, 더욱이 아버지에 의한 아들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설화의 가치는 시공을 초월한 보편성에 있다. 최인훈이 여기서 발견한 보편성은 과거건 현대건 구원자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민중의 비극적 상황이다. 물론 그는 마지막 장에 아기장수의 부활과 부모를 동반한 승천, 또한 민중의 신명나는 춤을 삽입했다. 그러나 「훠어이 훠이」 구원자를 쫓으며 벌이는 춤판이 신명나면 날수록 그들의 비극성은 더욱 심화할 뿐이다.
비극적 신명! 최인훈의 희곡이 시적인 힘을 지니는 것은 극히 절제된 대사와 시 형태의 지문 외에도 이러한 역설과 대조가 넘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누엘 루트겐홀스트가 연출한 이번 공연은 주로 절제에 초점을 맞춘듯, 밖에서 흥청대며 무대 안의 민중을 위축시키는 포졸들의 노랫소리는 너무 조심스러웠고 비슷한 효과를 보이는 다양한 시청각적 수단들도 그 강도가 불충분했으며, 역설적 비극의 절정이라 할 마지막 춤판은 아예 삭제되고 말았다.
물론 강하고 약함, 빠르고 느림은 모두 상대적이므로 「대사·움직임이 모두 느리게, 그러면서 더듬거리는 분위기가 나오도록」 하라는 작가 서문을 따르면서도 대조는 충분히 가능하다. 따라서 대조의 부족은 다른 쪽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배우들의 절제가 내적 타당성보다는 다소 작위적인 힘에 의존했고 그 힘 역시 관객에게 부담을 주며 대조를 깨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합리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 작가의 주문이 타당성 확보 의무를 면해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행간을 놓치는 피상적 합리보다는 직관과 감성으로써 작품을 정확히 파악해 전달하라는 고차원의 요구이다. 하지만 이번 공연은 연기 미술 음향등 각 분야의 의도가 피상적인 설명만 가능할 뿐 조화를 이루며 관객의 감성을 흔들지는 못하는 수준이었다. 아마 스태프까지 포함한 참가자 전원의 고른 감성과 해석의 완전일치가 없었거나 표현력의 확립이 불완전했기 때문이리라 본다.<오세곤 연극평론가·가야대 연영과 교수>오세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