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3월11일 체르넨코의 사망이 발표된 지 4시간 만에 소련 공산당서기장에 선출된 고르바초프는 국내외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 54세. 스탈린 이후 가장 젊은 서기장의 탄생이었다. 모스크바대학 출신의 지식인이 서기장에 취임하기도 처음이었다. ◆당시 소련은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3대의 서기장이 상징하듯 국가조직 전체가 늙고 병들어 있었다. 미국과의 무리한 군비경쟁과 사회주의 통제경제의 실패로 나라 살림은 이미 거덜 나 있었다. 실속없이 끼어든 아프가니스탄 전쟁터에서 젊은 병사가 수없이 죽어가는 데도, 그리고 그것이 사회불안의 화근이 돼 있는데도 크렘린의 노쇠한 머리는 타개책을 찾지 못했다. ◆고르바초프는 바로 그때 권력의 정상에 등장했다. 전임자들과는 달리 그의 선출 절차가 이례적으로 신속했던 것 자체가 그에 대한 크렘린 내부의 압도적 지지를 상징했다. 모스크바 시민도 지적 청신함을 갖춘 그의 강력한 지도력이 빈사상태의 소비예트 체제와 국민생활을 쇄신해 주리라 기대했다. ◆러시아 외교의 대부 그로미코는 『그의 화려한 미소 속에는 강철의 치아가 감춰져 있다』고 그를 칭송했다. 서방측에서의 인기는 국내를 능가했다. 그의 지적 탐구심과 위트, 활달한 언동에 대처총리나 레이건대통령 같은 완고한 보수정객들까지 매료됐다. 그는 전에 보던 음산한 모습의 크렘린 지도자가 아닌 「붉은 케네디」였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오늘 그의 영락은 비참하다. 지난 16일의 대통령 선거에서 얻은 득표율은 0.5%에 불과했다. 유세 도중에는 성난 군중에게 뺨을 맞는 수모마저 겪었다. 민중은 그들을 가장 뜨겁게 사랑하는 지도자의 희생을 먹고 사는 것인지 모른다. 러시아인에게 자유를 준 고르바초프나 폴란드인을 해방의 길로 이끈 바웬사의 몰락이 그런 민중의 배반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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