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장렬히 전사한건 1598년 11월19일 새벽 노량 앞바다에서 펼쳐진 해전에서 적의 탄환을 맞고서다. 전날밤부터 시작된 해상작전이 밤을 새워 계속된 끝에 승기를 굳힌 시점이었다.『싸움은 지금 한창이다. 내 죽었단 말 말고 계속 싸우라』는 충무공의 마지막 당부는 민족의 성웅다운 면모가 약여하다. 영국의 넬슨 제독이 트라팔가해전에서 스페인연합함대를 쳐부쉈으나 저격을 받고 전사하기전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했다』고 마지막 말을 남긴 것은 공보다 207년이나 뒤였다. 세계의 해전사에서 탁월한 전략과 고결한 인품으로 추앙받고 있는 공앞에서 못난 후손들은 지금 송구스러움으로 할말을 잃고 있다.
거북선 총통 조작사건이 터지자 불현듯 떠오른게 3년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박혜일교수가 발표했던 「이순신의 전사와 자살설에 대하여」란 논문이다. 그 논문에서 박교수는 『그의 죽음은 동시대인들에게 배신당한 영웅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다』며 의자살로 공의 전사를 규정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제시된게 7년간의 임란에 참전하면서 뛰어난 전략전술로 한번도 패한적이 없을 정도로 철두철미했던 장군이 그날은 구태여 갑옷을 벗고 선봉에 나섰다는 사실이다.
노량해전에 앞서 있었던 모함에 의한 투옥사건과 그 유명한 백의종군까지 했던 장군의 쓰라린 심정과 우국지심을 생각하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주장이 충분히 나올만도 한것이 아니겠는가.
당시 사람들의 배신도 배신이려니와 지금은 또 어떤가. 말로는 민족의 성웅이라 떠벌리고 현충사란 사당은 지었으나 하는 짓이란 공의 이름을 팔아 가짜 대포나 만들어 국보 조작극을 펴고 유물인양을 빙자해 나랏돈이나 축내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사심없이 우리 바다를 지켜야할 해군의 발굴단장이란 자는 유물인양지역의 조개채취독점권을 주는 대가로 거액의 뇌물까지 챙겼던 것이다.
충무공이 어떤 어른인가. 일찍이 후대의 숙종은 현충사에 내린 제문에서 「제몸죽고 나라 살아난 것을 이 사람에게서 처음봤다」고 공을 기렸었다. 충무공이 당포승첩을 보고하는 장계에는 『적의 철환이 신의 왼편 어깨를 맞혀 등을 뚫었으나 중상에는 이르지 아니했습니다』는 구절도 있다. 그런 중상을 입고도 종일 독전했고 싸움에 이긴 뒤에야 사람을 시켜 칼끝으로 살을 쪼개고 철환을 꺼내게 하니 깊이가 두치나 되었다는게 조카 이분의 기록인데도, 중상이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 용력과 천재적 전략, 그리고 구원의 표상이라 할 나라사랑과 후손들의 가슴을 뒤흔드는 대문장가로서의 공의 풍모는 란중일기와 시조들을 통해서도 영원히 빛을 발하고 있다.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라는 유명한 시조나 「나라 근심에 밤을 뒤척이노라니 새벽 달빛에 활과 창이 떠 오르누나」라는 구절에 담긴 뜻은 아직도 못된 버릇을 씻지 못하고 있는 이 땅에 영원한 교훈으로 남아 있다 할 것이다.
가짜 총통 사건이 터지자 국보지정과 문화재 심사제도를 고쳐야 한다는 등 논의가 지금 분분하다. 너무나 답답하기에 더욱 송구스러워지는건 충무공을 욕되게 하고 교훈을 저버린걸 한갓 제도의 문제로 여기고 있는 점이다. 그런 몰염치와 몽매함이야말로 충무공을 두번 다시 자살토록 하는게 아닌가 하는 가책이 가슴을 찌르는 것이다.
충무공의 장검에 새겨진 검명은 「세척 장검들어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의 빛이 흔들리네」이다. 장군의 혼이 담긴 그 장검의 섬광으로 이 못난 후손들에게 차라리 날벼락이라도 내려달라고 모두가 간청부터 해야할 때가 아닌가.
하지만 장군은 지금 구천에서라도 수루에 올라 나라 걱정으로 깊은 시름에 잠겨있을 너무나 크신 분이다. 그래서 더욱 몸둘바를 모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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