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석·브레히트의 절묘한 결합오태석과 브레히트? 이런 결합에 고개를 갸웃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유희적 감각의 연출가와 지성적 비판을 앞세운 작가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공연을 보면 「천재」들이 만든 연극에는 적어도 두가지의 공통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재미와 그리고 관객을 극에 참여시키는 능력이다. 비록 브레히트는 비판적 관심을, 오태석은 연극적 상상력이라는 방법을 동원하지만 말이다.
가짜 고무다리로 기어다니는 악어인간, 각종의 가짜불구와 앵벌이들, 그들을 착취하는 인간말종들, 창녀와 부패한 경찰, 그리고 순진함에 대한 모욕과 꼬리를 무는 배신…. 관객들은 브레히트가 오래 전에 묘사한 「서푼짜리 오페라」의 이런 모습들에 혐오감과 전율을 느낀다. 그러나 인간과 자본주의의 잔인함에 대한 이런 분노라는 점에서도 두 사람은 공통된다. 90년대 이후 오태석은 오늘의 우리 사회의 광기를 「심청이는 왜 두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나?」 「아침 한때 흐리고 비」에서 이미 더 충격적인 이미지로 제시했었기 때문이다.
오태석은 논리에 약한 감성의 작가, 초논리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이번 공연에서 브레히트의 복합적이면서도 구조적인 풍자와 비판을 영리하게 혹은 본능적으로 따라잡고 있다. 도둑·부랑배의 사회나 상류층의 사회나 살아가는 모습, 썩은 모습은 마찬가지라는 은폐된 풍자(이는 영화 「대부」의 숨은 주제이기도 하지만)는 똑똑한 관객들에게는 여전히 유효하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악하게 만들며 악한 부자는 가난뱅이들을 만들어 내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사악하다는 브레히트의 약간은 자가당착적 통찰도 오태석의 감각적 즉물적 인물묘사를 통해 섬뜩하게 드러난다. 비록 마르크스적 의미의 계급은 다소 퇴색되고 너무나도 천박한 풍요를 향해 내닫는 오늘의 상황 속에서도 말이다.
그러나 이처럼 복합적이면서도 직설적인 메시지들의 전달에 의해 오태석의 연극이 잃은 것도 없지 않다. 그의 연극의 열린 유희성은 어느 정도 닫혀지며 완급의 조절이 자유롭던 그의 숨쉬기도 때때로 어색하게 긴장될 수밖에 없다. 특히 과잉된 무대장치와 산만한 소품은 유희성이 지니는 이화효과에도 불구하고 메시지의 명료성에 대한 사족일 뿐 아니라 비브레히트적이다. 한국적 번안에도 불구하고 몇몇 인물표현의 국적과 게스투스(사회적 몸짓)가 조금 불분명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분위기를 잘 살리면서도 현대화한 작곡과 탁월한 노랫말들은 능청스럽게 때로는 비수처럼 관객들을 공격한다.<김방옥 연극평론가·청주대 교수>김방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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