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난 흠집될까 헬기동원/뜻밖 이른 내한 언론통보 진땀도/차 곡절끝 “완벽능력” 평가받아96년 새해가 밝자 한·일 양국 축구계의 관심은 애틀랜타 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전에 쏠렸다. 양국 언론은 이 대회의 성적이 올림픽티켓 획득은 물론 월드컵 유치활동에 중요한 변수라고 보고 만반의 대비태세를 갖췄다. 예선결과 한국과 일본은 나란히 4강에 진입, 3월27일 결승 격돌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 문제는 수면 아래로 잠복한 상태였다. 피터 벨라판 아시아축구연맹(AFC) 사무총장이 처음 제안한 후 한·일 정치권에서도 논의됐던 공동개최 문제는 95년 7월말 양국 정부가 단독개최 입장을 표명, 더이상 거론되지 않고 있는 터였다.
○“공동개최 나죽거든”
양국의 관심이 한·일 결승전에 쏠려있던 바로 이 때 느닷없이 한·일 공동개최 주장이 또 다시 제기됐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술탄 아마드 회장이 FIFA를 비롯한 각 대륙 축구연맹 회장에게 서한을 발송, 『2002년 월드컵은 아시아축구의 발전을 위해 한·일 공동개최가 바람직하다』며 협조를 당부한 것이다. 세계 축구계는 촉각을 곤두세우며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 만큼은 양상이 달랐다. 아마드회장의 입장 발표가 있자 후속타가 이어졌다. 유럽축구연맹(UEFA) 레나르트 요한손회장이 유럽지역 집행위원 8명과 공동서명으로 한·일 공동개최를 지지한다고 밝힌 것이다. 3명의 집행위원을 보유한 아프리카축구연맹(CAF) 이사 하야토회장도 동참했다.
반면 주앙 아벨란제 회장은 여전히 단독개최를 고수했다. 그는 막바지에 공동개최론이 대세를 이룰 때도 『내가 죽거든(over my dead body) 시행하라』고 호통칠 정도로 단독개최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한국은 이미 FIFA 개혁파에 정몽준회장이 적극 가담, 이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측은 이들의 공동개최 주장에 대해 『단독개최를 원하지만 FIFA가 결정할 경우 수용할수 있다』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반면 일본은 아벨란제회장의 눈치를 보며 단독개최를 주장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일본은 대다수 집행위원들로부터 반감을 사고 있었다.
○유럽에 발목잡힌 기분
개최지 결정투표일이 20여일 밖에 남지 않았던 지난 5월초. 정회장은 로마에서 열린 UEFA확대집행위원회를 참관한 뒤 제1회 쉘움브로 카리비안컵 대회가 열리는 트리니다드 토바고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로마에서 요한손회장이 살며시 귀띔한 말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있었다. 『5월31일 FIFA 집행위에서 한·일 공동개최안을 상정할테니 이번에는 닥터 정이 도와줘야 한다』는 말이었다. 정회장은 가슴이 답답했다. 유럽표를 잡기위해 공동개최를 수용할 수 있다고 밝혔는데 정작 자신은 유럽에 발목을 잡힌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공동개최안이 상정될 경우 이를 지지하는 집행위원은 최소한 14명이었다. 이들은 공동개최안이 부결돼 개최지 결정투표를 실시할 경우 대부분 한국을 지지한다고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정회장은 아벨란제회장과 일본이 끝까지 단독개최를 주장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국제축구계의 공동개최 주장은 일본보다 뒤늦게 유치경쟁에 뛰어든 한국이 일본을 앞지르거나, 최소한 일본과 대등하게 집행위원들의 지지를 이끌어 낸 것을 의미했다.
한국이 유치전에서 우위를 보이기까지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난해 10월 FIFA 조사단의 실사를 거의 완벽하게 치러낸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조사단은 11월초까지 한국의 대회 개최능력을 검증하면서 『흠잡을데 없다』고 결론내렸다. 한국에 이어 일본을 실사한 뒤에는 『양국의 개최능력은 동등하다』고 밝혔다.
○4박5일간 조마조마
한국유치위는 FIFA조사단이 실사활동을 벌이는 동안 외줄을 타듯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슈미트 독일축구협회 사무총장을 비롯한 조사단 5명이 머문 4박5일동안 한국유치위는 서너 차례의 「위기」를 넘겨야 했다. 조사단이 탄 스위스항공기는 10월31일 상오 9시35분에 도착예정이었으나 동북아 상공에 몰아친 뒷바람때문에 무려 55분이나 빠른 상오 8시40분에 도착했다. 당시 스위스항공측과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하고 있었던 유치위는 항공사측으로부터 조기착륙을 연락받고 각 언론사에 재빨리 통보했다. 이들은 입국 출입문을 여는 순간 카메라세례가 쏟아지고 환영인파가 밀려들자 감격스런 표정을 지었고 입국 첫날 한국의 뜨거운 유치분위기를 느낄수 있었다고 후에 털어놓았다.
유치위는 조사단 도착시간이 출근시간대여서 이들을 숙소인 신라호텔까지 실어나를 수송편 마련에 고심했다. 유치위는 『공항에서 최소한 2시간정도 걸릴 것은 뻔한데 첫날부터 교통지옥을 체험케 한다면 좋을게 하나도 없다』고 판단, 헬기를 동원해 이들을 상쾌하게 숙소까지 안내했다. 헬기를 동원해 신라호텔로 손님을 실어나른것은 이례적이었다.
이날 하오 8시에는 잠실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사우디대표팀과의 친선경기가 있었다. 경기를 관전한 조사단은 밤 10시께 숙소로 향했는데 88올림픽도로를 이용할 경우 허리가 끊긴 성수대교를 보게 될 것이 뻔했다. 잠실에서 숙소인 신라호텔로 가자면 올림픽대로를 타고 동호대교를 건너는게 지름길이지만 유치위는 할 수 없이 테헤란로를 이용, 반포대교를 지나 장충동으로 가는 우회코스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헬기찾아 백방 수소문
다음날 헬기로 포항에 도착한 조사단은 경주에서 오찬을 한 뒤 하오 2시께 부산으로 떠나기 위해 헬기에 올랐으나 3대중 한대가 계기고장을 일으켰다. 당황한 유치위 관계자는 『차편으로 가자』는 조사단을 달래면서 한편으로는 대체 헬기를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때마침 거제도 삼성조선소에 헬기 1대가 와 있다는 것을 알고 긴급히 「SOS」를 타전, 이들을 무사히 부산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만약 이때 조사단을 승용차에 태워 교통지옥인 부산시내를 통과하게 했다면 과연 『흠잡을데 없다』는 결론이 나왔을까. 아찔한 순간들이었다.<전상돈 기자>전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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