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흠집 내기로 한국 최악 상황/요한손·하야토와 비밀 연합/비전1·2 반아벨란제 포문2002년 월드컵 유치 활동 초기 정몽준회장은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이유로 변변한 후원조차 받지 못해 무척이나 고전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건 계기가 있듯이 한국의 유치전에서도 전환점은 찾아 왔다. 전환점은 「악재」로부터 시작했다. 지난해 4월 덴마크 언론이 『한국이 폴 힐드가드 집행위원의 생일날 정원수를 선물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일본유치위는 현지 신문을 재빨리 입수해 유출시켰다. 일본 언론은 『한국이 집행위원들을 매수하기 위해 뇌물을 공여했다』고 부풀렸다.
○“뇌물공여” 부풀여
당시 현지에 있는 현대 지사가 힐드가드위원의 생일날에 선물을 보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원수가 아니라 꽃다발이었다. 하지만 일단 일본 언론에 한국의 선물제공이 크게 보도되자 여론은 한국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유럽지역에서도 한국에 대한 인식이 악화했다.
일본의 축구주간지는 여기에 한술 더 떴다. 독일의 마틴 헤클러기자를 동원하여 5월초부터 무려 5주간 「사커 다이제스트」에 『한국은 뇌물로 집행위원들을 유혹하고 있다』고 집중타를 날렸다. 특히 정회장을 직접 겨냥해 『그는 월드컵을 유치해 지명도를 높인 뒤 대통령에 도전하려는 야망이 있다』며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브라질 축구협회장인 테이세이라 국제축구연맹(FIFA)집행위원에게는 현대자동차의 남미지역 딜러권을 주었다』는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도 유포했다.
정회장은 일본 언론의 「한국 흠집내기」에 분노했다. 곧바로 유치위와 축구협회 수뇌부의 대책회의가 소집됐다. 언론에 이 사실을 알려 맞불을 놓거나 유언비어 유포와 인신공격을 명예훼손 혐의로 제소하는 방법, 일본보도를 무시하되 가급적 외국언론에 적극 해명하는 방법 등이 검토됐다.
정회장은 마지막 안을 택했다. 신빙성 없는 이야기로 한국을 비난하고 있는 일본언론과 정면으로 대응해 봤자 이득이 없다는 결론이었다. 대신 정회장은 외국기자들과의 간담회를 적극적으로 마련해 해명하는데 노력했다.
○그만둘까 마음 흔들려
그러나 일본언론의 왜곡 보도로 한국의 유치활동은 치명타를 맞아 분위기는 전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월드컵의 한국 유치는 이미 물건너 간 것같은 분위기였다.
정회장은 입술이 바짝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괜히 유치한다고 나섰나 보다』『이제라도 그만 둘까』정회장은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6월초 한국에서 코리아컵 국제대회를 마친 정회장은 스웨덴에서 열리는 세계여자축구선수권대회를 참관하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정회장의 머리 속은 온갖 실의와 상념으로 뒤범벅이었다.
스웨덴에서 마주친 유럽지역의 집행위원들은 「덴마크 스캔들」을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듯 냉랭하게 정회장을 대했다. 그러나 정회장은 묵묵하게 「때」를 기다렸다.
「때」는 마침내 숙명처럼 정회장에게 찾아 들었다. 차가운 시선을 느끼면서 정회장은 부지런히 유럽축구연맹(UEFA)의 레나르트 요한손회장을 비롯한 여러 집행위원을 만나고 또 만났다.
어느날 정회장은 눈과 귀를 번쩍 띄게 하는 낭보를 들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아프리카 축구연맹(CAF)의 이사 하야토회장이 『요한손과 내가 4월 FIFA개혁에 대해 논의했다. 조만간 보고서를 공개할 것』이라고 귀띔해 준 것이다.
소위 「비전 1」의 탄생을 지칭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FIFA 재정의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22년간 독주해온 주앙 아벨란제 회장을 견제하기 위해 유럽과 아프리카가 연합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미국 존스 홉킨스대학의 국제정치학 박사인 정회장의 머리회전은 빨랐다. 하야토회장으로부터 「비전 1」의 복사본을 받아 쥔 그의 손은 가볍게 떨렸다. 『기회는 왔다』
정회장은 곧바로 요한손회장과 접촉했다. 정회장은 『내가 FIFA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는 않지만 FIFA의 재정과 운영에는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며 선수를 쳤다. 요한손회장도 정회장의 이같은 발언에 호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함께 일해 봅시다”
사실 요한손회장과 하야토회장의 연합전선은 극비리에 구축됐지만 추진력에서 문제가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젊고 패기 넘친 정회장이 자신들에게 동조하자 요한손회장은 정회장의 손을 덥석 잡으며 『함께 일해 봅시다』며 반겼다.
정회장은 8명의 유럽집행위원과 3명의 아프리카 집행위원을 단결시킬 수 있는 요한손과 하야토회장이 필요했고 요한손회장은 FIFA부회장으로서 추진력이 강한 정회장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당시 유럽언론은 정회장의 가세를 두고 『요한손은 파이터를 얻었다』고 평가했다.
이후 정회장은 이들과 연쇄 접촉하며 본의 아니게 FIFA의 개혁을 목청 높여 주장했다. 이는 아벨란제회장이 일본으로 쏠렸다고 판단한 정회장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고 열세에 놓여 있는 한국의 유치활동을 반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축구계 발칵 뒤집어져
요한손, 하야토회장과 정회장이 「비전 1」을 들고 나오자 세계축구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이들은 『FIFA 재정과 행정에 문제가 많다. 따라서 투명성이 보장될 수 있도록 행정체계를 바꿔야 한다』고 선언, 아벨란제회장에 대한 공개 도전에 나섰다. 뿐만 아니었다. 이들은 곧바로 「비전 2」를 발표, 『FIFA 회장은 대륙 연맹별로 호선제로 하자』고 제안해 아벨란제회장에 대한 직격탄을 퍼부었다.
정회장은 요한손회장을 비롯한 유럽집행위원과 하야토를 중심으로 하는 아프리카 집행위원들과 더욱 공고히 결속해 나가며 아벨란제를 공략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한국유치의 당위성을 이들 머리에 주입시키는 일을 시작했다.<전상돈 기자>전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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