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돌림 등 수모속 한때 환심사기 노력/잇단 독선에 반발 확산 “한줄기 자신감”일본과의 2002년 월드컵 유치경쟁은 사실상 국제축구연맹(FIFA)내의 주앙 아벨란제회장과 정몽준부회장간의 대결구도로 압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또 아벨란제회장으로 대표되는 FIFA내 구체제와 정부회장을 앞세운 신체제의 한판승부이기도 했다.
정축구협회장은 지난해초까지만 해도 아벨란제회장의 호감을 사기위해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아벨란제회장은 74년이후 무려 22년간 FIFA회장으로 재임해온 국제축구계의 절대권력자였고 그의 비위를 거스를 경우 월드컵유치는 불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회장은 아벨란제회장이 나타나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갔다.
그러나 정회장은 아벨란제회장의 마음이 이미 일본쪽으로 기운 것을 확인해주는 여러가지 장면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마음의 갈등을 겪기 시작했고 결국 그와 대항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정회장의 태도변화가 감지된 것은 지난해 8월께. 그는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느닷없이 아벨란제회장을 강도높게 비난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정회장은 기자들이 아벨란제회장의 친일적인 행동을 지적할때마다 『유치활동을 위해 참아달라. 그를 비판적으로 보도하면 일을 그르칠 우려가 있다』며 부탁했던 터였다. 하지만 정회장은 개최지조기결정론과 관련한 아벨란제회장의 편향적 태도를 목격하고 방향을 선회했다.
아벨란제회장은 조기결정주장에 강력히 항의하는 정회장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95년8월초 세계청소년대회 참석차 에콰도르에 가있던 정회장은 아벨란제회장으로부터 참기 어려운 수모를 당했다.
이른 아침 호텔에서 눈을 뜬 정회장은 기분나쁜 적막감을 느꼈다. 호텔을 둘러본 정회장은 함께 묵고있는 아벨란제회장과 다른 집행위원들이 모두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아벨란제회장 일행이 정회장만 빼놓고 준결승전이 열리는 다른 도시로 이동한 것이었다. 옷도 제대로 챙겨입지 못한 정회장은 정신없이 공항으로 달려갔다. 가까스로 아벨란제회장 일행을 따라잡고는 비행기에 동승했다.
아벨란제회장은 이처럼 정회장을 의식적으로 따돌렸다. 그 자신이 일본에 편향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FIFA의 민주화와 투명성을 요구하는 정회장을 눈엣가시같은 존재로 생각했다. 그러나 정회장의 반아벨란제 입장은 이미 유치전략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FIFA의 개혁파를 등에 업지 않고는 유치전에서 승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해 12월 정회장은 아벨란제와 대항해도 승산이 있다고 확신을 갖게한 중대한 계기를 맞게 된다. 당시 파리에서 열린 집행위원회에서는 97년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의 개최지 문제가 토의됐다. 97년 개최지는 말레이시아로 이미 결정됐는데 아벨란제회장이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열도록 해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정회장이 이끄는 아시아연맹이 이에 반발한 것은 물론이었다. 여기에다 아벨란제의 이같은 독선에 평소 불만을 품어왔던 유럽연맹도 반발하고 나섰다. 정회장은 이미 FIFA 재정과 행정의 투명성을 요구하며 아벨란제와 반목하고 있는 유럽연맹(UEFA)의 레나르토 요한손회장과 연합전선을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결국 이날 회의에서는 요한손과 정회장이 이끄는 FIFA의 개혁파가 아벨란제의 아성을 무너뜨리는 일대반란이 일어났다. 개최지 변경은 반대 11표, 찬성 10표로 부결됐다. 이제까지 단한번도 꺾이지 않았던 아벨란제회장의 권위가 처음으로 무너진 순간이었다. 11표는 유럽(8표)과 아시아(3표)가 연합한 결과였고 양대세력만 협력한다면 난공불락으로만 보였던 아벨란제의 아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계산이 수치로 입증된 것이다.
사실 아벨란제회장은 이날 투표에서 이길 것을 확신했다. 홍콩의 헨리 폭 집행위원이 비행기 스케줄의 잘못으로 이날 회의에 불참할 것으로 통보돼 투표를 하더라도 10―10 동수가 나오고 자신이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헨리 폭위원은 회의가 시작된 직후에 땀을 뻘뻘 흘리며 회의장에 도착했고 결국 투표는 11―10이라는 간발의 차로 결판이 났다.
이날 회의이후 정회장은 요한손회장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채 아벨란제회장에 맞서면서 2002년 월드컵개최에 대한 믿음을 서서히 키워나갔다. 특히 정회장은 3명의 아프리카 집행위원들이 97년 청소년대회 개최지를 나이지리아로 옮기기 위해 아벨란제회장의 주장에 일시적으로 동조했지만 이는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아프리카연맹의 하야토회장(카메룬) 역시 요한손회장과 함께 개혁파를 이끌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정회장은 그러나 아벨란제회장의 긍정적 역할에 대한 평가도 주저하지 않는다. 우선 아벨란제회장이 21세기의 첫번째 월드컵을 아시아로 가져온 것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결정이었다고 보고있다. 또 아벨란제회장이 『월드컵이 통일된 한국에서 열리면 좋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 것도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다. 우리가 이번 기회를 잘 활용할 경우 남북관계가 크게 개선될 수 있다고 정회장은 강조한다.
정회장은 『우리의 노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한국의 유치노력이 FIFA의 변화기류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면서 『상당수 유럽 집행위원들은 한국의 유치가 FIFA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표결로 갔더라면 짜릿한 흥분을 맛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면서 『FIFA는 여소야대였다』고 말했다. 아벨란제회장의 여가 유럽 등 한국을 지지하는 야세력에 밀렸다는 뜻이다.<전상돈 기자>전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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