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체제 염증·배신감 “남으로 가자”31일 서울에 무사히 도착한 정갑렬씨와 장해성씨는 목숨을 건 모험을 계속한 끝에 망명에 성공했다. 정씨는 제네바에서 북경(베이징)으로와 망명을 신청한뒤 홍콩에가서 정식망명했고 장씨는 북한을 탈출해 4개월여동안 중국의 동북3성등을 전전한끝에 홍콩에 잠입해 망명했다. 정씨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연구활동을 하고싶다』고 새생활에 대한 기대를 밝혔고 장씨는 『쓰고 싶은 글을 마음대로 쓰고 싶어 망명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두사람을 조사중인 수사기관의 자료등을 토대로 평양에서 서울까지의 탈북기를 재구성 해본다.<편집자 주】>편집자>
◎과학자 정갑렬씨/기술·과학경시 “박사꿈 무산”에 좌절/한국대사관 닫혀 일대사관찾아 호소
나의 아버지는 맹렬한 공산주의 신봉자였다. 23년 경남 진양군 대곡면 설매리에서 출생한 아버지는 해방전 일본으로 건너가 나중에 오사카 조총련 재정부부장이 됐다. 51년 2월7일 일본 오사카(대판) 다카스키(고규)시 아쿠타가와(개천)초(정)에서 태어난 내가 북한으로 가게 된 것은 북한이주를 고집한 아버지 때문이었다. 지난해 돌아가신 아버지(정재선·당시 72세)를 따라 우리 가족은 59년「지상낙원 내 조국」에의 동경과 꿈을 안고 북송선을 탔다.
오사카 조선초급학교 3학년 재학중 북한으로 이주하게 된 나는 평남 강서군 기양중학과 기양고등기계학교를 졸업했다. 고교재학중 주조 열처리 기술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과학자가 되고 싶었던 나는 재능을 인정받아 김일성종합대학 물리학부에 입학했다. 대학졸업후 나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고체물리 전문가로서 3급 연구가(준박사)가 됐고, 81∼86년에는 과학도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국가과학원 물리연구소에서 연구사로 일했다.
하지만 북한 체제의 어찌할 수 없는 내재적 한계는 나에게 어두운 절망을 예비하고 있었다. 북한사회에선 재능이 연륜을 넘어서지 못한다. 준박사와 박사칭호도 나이로 딴다. 게다가 학계는 시기와 질투, 견제와 무고가 난마처럼 얽힌 복마전이다. 핏줄을 나눠가진 가족도, 형제처럼 가까운 인척도 이 복마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 이성을 잃고 만다.
준박사 과정을 끝낸 나는 박사신청을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아내(김경애)의 언니가 내 길을 가로막고 나섰다. 같은 과학자였던 그녀는 시기에 눈멀어 나를 무고했다. 박사학위는 끝내 내 손에 들어오지 못했고 이때문에 아내와도 멀어졌다.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우리는 85년 결국 이혼했다.
1년간 별다른 직업 없이 지내던 나는 87년 평양대극장 음향기술실험실 연구원으로 취직해 89년까지 일했다. 그 이후에는 메아리음향사로 직장을 옮겨 음향소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메아리음향사의 사장인 조총련 2세 김일룡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 게다가 형(정정렬)과 함께 집안의 전재산을 털어 강서군에 낸 메아리음향사 분점이 영업이 안돼 문을 닫게될 지경에 이르게 돼 살아갈 의욕을 잃게 됐다.
그런 나에게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발명, 신기술및 신제품 전시회」가 기회로 다가왔다. 과학자로서의 희망도 꺾이고 사업가로서의 앞날도 좌절된 나는 자포자기 상태로 전시회에 참가했다. 귀국하는 길에 망명을 결심했다. 단장 1명과 통역 1명 기술자 5명등 모두 7명의 북한대표단은 제네바로 가기 앞서 북경(베이징)을 거쳤다. 우리 일행은 귀국길에도 다시 북경을 경유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4월28일 전시회가 끝난뒤 항공기 대신 기차를 탄 일행은 5월7일에야 기나긴 여정을 끝내고 북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일행에게 『스위스로 가기전 북경에서 산 안경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바꿔야 겠다』고 핑계를 댄뒤 숙소를 빠져나왔다. 곧바로 한국대사관을 찾았으나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북경 한국대사관에는 매일 10여명의 망명신청자가 몰려 일과시간 이후에는 조선말을 쓰는 사람과 일체 접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일본대사관으로 향했다. 일본어에 능통했으므로 대사관관계자들과 접촉할 자신이 있었다. 이미 밤11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대사관 직원은 나의 망명요청에 『내일 다시 오라』며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일이면 모든 것이 끝장난다. 한국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매달렸다. 결국 이튿날 새벽 한국사람 1명을 소개받았고 그의 도움으로 상해(상하이)·심천(선전)등을 거쳐 15일 홍콩에 도착했다. 홍콩 한국총영사관은 나를 향해 열려 있었다.
비교적 여유있게 진행되던 망명절차가 29일 밤부터 긴장감을 띠며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의 망명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 됐다는 것이다. 나를 보호하고 있던 홍콩 신계의 상수특별감호소측은 30일 밤 나를 홍콩의 한국총영사관에 인도했다. 이제 비행기만 타면 꿈에 그리는 서울로 가게 된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마침내 31일 상오 홍콩의 게이탁공항을 출발하는 대한항공편에 몸을 싣게 됐다. 태극마크도 선명한 대한항공기는 나에게 조국이 새삼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었다. 3시간30분간의 비행시간 내내 긴장과 흥분으로 온몸이 옥죄어 왔다.
비행기가 착륙준비를 하며 고도를 낮추자 창문을 통해 서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고층건물들과 아파트 숲이 보였다. 다른 탑승객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 김포공항 입국장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기자들이 대기 하고 있었다. 어느 기자가 소감을 물어왔다.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습니다. 이렇게 환대해 주어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방송작가 장해성씨/김정일 취재한 내용 동료에 얘기 화근/“체포임박”에 기차탑승 두만강서 “투신”
『장동무, 큰 일을 좀 맡아줘야 되갔어. 김정일장군님의 영웅적인 어린시절을 취재해 원고를 써보라우』
지난해 가을쯤이었다. 중앙방송위원회 라디오담당 정치위원이 갑자기 불러 이같은 지시를 내렸다. 쉽게 말해 김정일의 어린시절을 우상화하는 원고를 쓰라는 것이었다. 85년 2급 작가가 된 이후 김일성수령의 항일투쟁을 주제로한 소설 「열 사흘전」과 「한 투사의 추억」외에는 줄곧 평범한 라디오드라마 원고만 집필 해오던 나에게 10여년만에 부여된 「명예로운」임무였다.
즉시 김일성수령의 항일투사시절 자료와 증언들을 구하는 한편 김정일의 출생지에 대한 취재에도 나섰다. 하지만 취재결과 김정일의 출생지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백두산 밀영의 「정일봉」이 아니라 소련의 연해주 하바로프스크 부근이었다.
또한 그의 어린시절은 「영웅적」이기는 커녕 온갖 비행투성이였다. 위대한 수령의 아들로 태어나 칭찬과 보호만 받으며 자라 오만방자하기 그지 없었다.
하늘이 무너질 것만 같은 실망과 배신감이 밀려왔다. 기억은 더 거슬러올라가 김정일도 부럽지 않던 내 유년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44년 중국 길림(지린)성 화룡현 두도구 용평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장승록)는 해방이 되던 45년8월 만주에서 소련군 진주 환영행사에 나갔다가 일본 패잔병들을 소탕하는 별동대에 입대했다. 이듬해 중국인민해방군에 배속됐다가 49년 부대 전체가 조선인민군 4사단으로 편성되면서 가족들을 데리고 북한으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그후 50년7월20일 대전전투에서 사망, 혁명열사가 됐고 덕분에 나는 남부럽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고등중학교를 나와 김일성호위국(83년 김일성호위총국으로 개편)에서 군복무를 마친뒤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 76년 철학부를 졸업했다. 그후 3대혁명소조 지도원으로 일하다 79년 중앙방송위원회 기자로 배치됐고 이어 글을 잘 쓴다는 이유로 85년부터 2급 작가로 임명됐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속았다는 배신감을 도저히 혼자 삭일 수가 없었다. 동료 작가인 송금철에게 이 사실을 얘기 했는데 바로 이게 화근이 됐다. 지난해 10월29일 송금철이 갑자기 국가안전보위부원들에게 잡혀간 것이다. 불안감속에 방송 창립 50돌 행사가 있었고 11월18일엔 김정일과 기념사진도 찍었다. 하지만 11월24일 마침내 보위부가 나를 직접 조사하기 시작했다. 완강한 부인에도 불구, 세번째 조사때 그들은 『송금철이 다 불었으니 포기하라』고 협박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1월14일 보위부의 이정현 책임지도원으로부터 『10일쯤 후면 장동무를 못볼지도 모르겠구먼』이란 말을 들었다. 체포가 임박했다는 뜻이다.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단어 하나가 있었다. 탈출! 바로 그것이었다. 방송일을 하면서 가끔씩 서방세계와 남조선 모습을 접할 때마다 떠올렸던 단어이기도 했다. 탈출은 결심했으나 처와 어머니, 그리고 작년에 시집간 맏딸과 한살배기 막내등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질것 만 같았다.
드디어 1월21일 평양서 양덕군까지 갈 수 있는 통행증을 받아냈다. 술을 얻으러 간다는 명목이었다. 통행증 목적지를 청진·선봉으로 위조했다.
자꾸만 눈앞을 어른거리는 가족들의 모습을 뒤로한채 기차를 타고 선봉에 도착했으나 비표가 달라 붙잡혔다. 다행히 작가 신분을 내세우고 사정한 끝에 겨우 풀려났다. 점점 초조해지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곧바로 강양역에서 기차를 탔다. 두만강에서 뛰어내려 중국으로 건너갈 작정이었다. 기차는 출발하자 마자 이내 얼어붙은 두만강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한 5백쯤 달렸을까,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던졌다. 어깨가 우지끈했지만(이때 쇄골이 부러졌다) 무작정 중국국경쪽으로 뛰었다. 뒤쪽에서 『돌아오라』는 외침이 들려 돌아보니 북한경비병들이 총을 겨누며 소리치고 있었다. 『중국 갔다 오면서 맥주하고 담배를 갖다 줄테니 내일 이시간에 보자』고 했더니 잠잠해졌다.
이후 3개월동안 용정 천진 북경 연길등을 부랑아처럼 떠돌아다녔다. 북한으로부터 「1급 체포령」이 내려진 가운데 체포조에게 잡히는 날이면 코가 꿰어 처형될게 뻔했다. 때로는 벙어리흉내도 내야했고 때로는 토굴이나 야산생활도 해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도 가끔씩 만나는 남한 목사들이나 기업인들로부터 적지않은 도움을 받기도했다.
많은 사람들의 조언에 따라 5월14일 우여곡절끝에 홍콩땅을 밟았고 즉시 한국 총영사관을 찾았다. 나에 이어 과학자 정갑렬씨도 탈출에 성공한 사실을 알고는 역시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보름간 이곳에서 지낸끝에 31일 드디어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평양 집을 떠난지 4개월여만에 자유의 품에 안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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