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 주미부대사로 정계입문 92년 당수에/엔테베작전서 형전사 계기로 반아랍 투쟁벤야민 네탄야후 우익 리쿠트당 당수(47)가 「이스라엘 사상 첫 직선총리」자리에 바싹 다가섰다. 부재자 투표 개표가 남아 있긴 하지만 30일 일반개표 종료결과 일단 시몬 페레스 현총리를 눌렀다.
선거를 앞두고 그는 일찌감치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놀람과 우려가 교차했던 것은 물론이다. 정치입문 10여년 만에 「세계의 화약고」 중동의 한 축을 점한 풍운아적 출세기에 대한 놀람의 한편에는 그의 강경노선이 아직 요람에 있는 중동평화를 뒤흔들 것이란 우려가 더 무성했다.
이스라엘 최강 특수부대 출신으로 『아라파트를 죽일 가능성이 10%만 있다면 내가 죽을 확률이 90%라도 낙하산으로 적진에 뛰어 내리겠다』는 그의 거듭된 호언은 이같은 우려에 무게를 더한다.
네탄야후는 82년 주미 이스라엘 부대사로 정계에 입문한 경력에서도 나타나듯 자타가 인정하는 미국통이다. 미필라델피아에서 고교 졸업 후 MIT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세계적 경영자문회사인 보스턴 컨설팅사에서 근무하는 등 미국 생활만 10년이 넘는다.
그는 76년 팔레스타인 게릴라에 의해 납치된 민항기를 구출하기 위한 엔테베 작전에 형이 참가했다 전사한 것을 계기로 철저한 반아랍주의자가 됐다. 이후 그는 조지 슐츠 전미국무장관의 후원으로 워싱턴에 대테러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테러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법」이란 유명 저서를 내기도 했다.
이츠하크 샤미르 전총리밑에서 주유엔대사 공보차관 외무차관을 지낸 그는 92년 총선 패배로 샤미르 총리가 당직을 내놓자 리쿠트당의 지팡이를 넘겨 받았다. 천부적인 웅변과 흡인력으로 침체에 빠진 당에 활기를 불어 넣는데 성공했다. 40대의 젊음과 수려한 용모로 여성 지지층을 사로잡는 데도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그에게도 약점은 있다. 두번씩이나 이혼을 했고 혼외정사 추문도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우익 헤루트당의 창단멤버인 부친과 엔테베 작전에서 전사한 형이 형성한 가문의 후광은 사생활의 그늘을 묻어 버리기에 족했다. 그는 선거기간 지지층을 넓히기 위해 중도노선에 접근했으나 『우리가 타협자세를 보이면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은 더 오만해 질 것』이란 생각은 한시도 떨치지 못했다고 한다.
경제정책으로는 10년내 1인당 국민총생산(GNP)을 배증, 15대 경제대국에 진입하겠다고 내세우면서 규제완화와 민영화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당선돼도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는 만날 일이 없을 것』이란 그의 강경노선이 경제발전과 어떻게 조화할 수 있을지 여전한 의문이다.<배연해 기자>배연해>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