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권 서부,독일어권에 번번히 밀려/경제력뒤지고 개헌 등 반대부딪쳐 부결/제네바공항 노선폐지로 끝내 분노 폭발스위스연방이 흔들리고 있다. 스위스는 이제 더 이상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갖는 주민들로 구성돼 있으면서도 말다툼 한 번 없이 평화롭게 사는 나라가 아니다.
스위스 정체성의 위기는 지난해 가을 스위스항공(Swissair)이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대륙간 국제선 중심공항을 취리히로 단일화하고 제네바에서 떠나는 노선 13편을 없애기로 한 데서 시작됐다. 이 조치는 제네바 로잔 등 프랑스어권 서부지역 주민들의 독일어권 지역에 대한 분노를 폭발시켰다.
흥분한 제네바 젊은이들은 이 항공 제네바사무소를 점거하기도 했다. 프랑스어권 스위스의 대변지인 누보 코티디엥의 자크 필레 편집국장은 『로망디(프랑스어권 서부스위스)의 파국, 취리히공항에 대한 무역전쟁을 선포한다』는 캠페인에 나섰다. 정치인들도 독일어권을 『오만하다』고 비난하며 가세했다. 독일어권 지역의 「억압」에 대한 서부 주민들의 분노는 92년 12월 국민투표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투표는 스위스의 유럽경제지역(EEA) 가입에 대한 찬반을 묻는 것으로 700만 국민의 18%인 프랑스어권 주민들은 압도적으로 찬성했으나 3분의 2에 달하는 독일어권 주민들의 반대로 부결됐다. 초보적인 유럽통합에도 반대한 투표결과는 서부 주민들에게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그 이후 서부 주민들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연방의회는 3주동안 회의장소를 수도 베른에서 제네바로 옮기기도 했다. 제2모국어인 프랑스어 수업을 원래보다 앞당겨 4학년때부터 시작하는가 하면 일부 주에서는 대학진학시험을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치르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나 EEA가입 거부 이후에도 프랑스어권 주민들은 개헌 등 중요한 결정에서 6번이나 표로 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스위스항공의 조치가 발표되자 『넘치기 일보 직전의 물동이에 물 한방울을 떨어뜨린 격』이 된 것이다.
물론 이같은 분노의 배경에는 경제적 격차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서부 스위스는 실업률이 7%로 독일어권의 4.6%보다 훨씬 높고 회사 도산율도 높다. 취리히에서 바젤에 이르는 독일어권 산업·금융지역은 안정적인 반면 프랑스어권 주들에서는 경제가 흔들리고 있다.
문제가 확산되자 연방정부와 스위스항공은 4월 26일 서부 주 정부측과 모임을 갖고 제네바에서 취리히를 연결하는 셔틀항공기를 올 가을부터 매일 11편씩 운항하기로 했다. 셔틀은 30분이면 취리히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같은 미봉책으로 서부 주민들의 분노의 불길을 잠재울 수는 없을 것 같다.<이광일 기자>이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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