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속에 끼어든 인식과 굴절의 시이원의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문학과지성사간)가 처녀시집이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나는 좀 놀란다. 아직 서른을 못 넘긴 이 시인의 생각의 깊이가 뜻밖에도 웅숭한 탓이다. 「세계의/어디서나 출입구는/입과 항문처럼 뚫려있다」같은 진술은 분명 젊은 눈의 직관이 순간적으로 포착해 낸 통찰이겠지만, 이어서 「신발 속으로 현실의 발을 집어넣는다/그 속은 아득하고 둥글다/한 발을 살짝 문밖으로 내민다/덥석 세계의 입이 닫힌다」는 구절을 읽으면, 그의 통찰이 그저 재기만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그의 시의 기본 윤곽은 그가 사사한 오규원으로부터 많은 것을 빚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표정한 사물들 속에서 삶의 이치를 길어내는 것이 오규원풍 시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점에서 그의 시가 정현종의 놀이의 시와 다르게 인식의 시이고, 황동규의 사물들의 바깥을 주행하는 바퀴의 시와 다르게 사물들의 안으로 꺾여 들어가는 굴절의 시라면, 이원의 시도 인식의 시고 굴절의 시다. 그 인식의 시는 앞의 시구처럼 난마처럼 그러나 빈틈없이 얽혀 있는 욕망의 그물체계를 읽으며, 그 굴절의 시는 「현실의, 무릎과 무릎 사이는 결코, 닿지 않아도 그림자의 무릎은, 하나로 붙어 있다」에서 보이듯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결여의 욕망이 욕망의 안감을 이루고 있음을 들춰보인다.
그러나 제자가 스승과 다르게 간 길이 없다면, 나는 부러 그를 말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오규원의 시에서 그 인식과 굴절을 이끌고 가는 운반체는 「시선」이다. 개봉동 장미처럼 구부러져, 사물들의 언더그라운드로 슬그머니 틈입하는 시선이 바로 그것이다. 반면에 이원의 그것은 특이하게도 입김이다. 「떠나온 곳을 알 수 없는 한떼의 공기/주전자의 보리차처럼 그림자에게 쏟아져내린다」에서 딱딱한 알갱이로 변해버린 공기들이 그 입김의 현실태이다.
그것은 오규원이 시선의 자유로운 운동을 위하여 몸을 멀찍이 떨어뜨리고 있는 것과 달리 그는 사물들의 조밀한 틈새로 몸을 끼워넣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제자는 스승이 이룬 해체주의적 조형주의와는 달리, 서걱거리는 진창주의라고 이름 붙이고 싶은 고유한 세계를 이룬다. 그 진창주의에서 그의 입김은, 그러니까 그의 감각하고 감각주는 몸의 운동은, 스스로 사물이 되어 버석거리며 사물들의 릴레이, 사물들의 시소에 참여한다. 제자는 스승을 본받음으로써 스승으로부터 일탈한다. 나는 아무래도, 전통의 계승은 「삼촌으로부터 조카로 이루어진다」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명제를 수정해야 할 듯 싶다.<정과리 문학평론가·충남대교수>정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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