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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변호인단 반대신문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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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변호인단 반대신문 전략

입력
1996.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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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회부분 희석 10·26재판 부각/「정 총장 내란방조」 방패삼아 집중거론/전씨 큰틀잡고 노씨등은 살붙이는 식27일 10차공판까지 두차례 진행된 12·12 및 5·18사건 변호인 반대신문에서 변호인단은 다양한 「대응전략」으로 12·12당시 전두환 합수본부장측의 행위에 대한 정당화를 시도했다. 12·12사건 변론과정에서 드러난 이같은 「기본틀」은 앞으로 5·17과 5·18사건의 변호인반대신문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것으로 보여 주목을 끈다.

변호인단은 우선 전씨에 대한 집중적인 신문을 통해 전체적인 변론의 큰윤곽을 잡은뒤 노태우씨등 나머지 피고인을 통해 이를 입증, 보강하는 형태로 반대신문을 진행했다. 또 내용면에서는 당시 합수부측 행동을 직접 설명하기보다는 「관련정황」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십분활용했다. 변호인단은 12·12사건에서는 이러한 정황증거로 하나회와 10·26사건재판을 채택했다.

하나회는 검찰이 12·12에 가담한 신군부측 장성들의 연결고리로 보고 있는 정규육사출신 신군부 인맥. 하나회 장교들의 군내 입지보전을 쿠데타의 동기로 보는 것이 검찰의 논지다.

전씨는 그러나 『하나회는 비밀조직이 아닌 친목단체』라며 『73년 윤필용장군사건이후 하나회는 해체됐는데 5공화국을 음해하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하나회를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피고인 변호인의 첫 신문은 『하나회에 부회장과 총무도 있느냐』로 시작돼 『느슨한 조직인데다 오래전에 해체됐기 때문에 조직으로서의 모양새를 갖췄는지 기억이 전혀 없다』는 대답으로 끝났다.

다른 피고인들도 『하나회의 후원자나 회원은 아니지만 박정희대통령도 하나회를 격려했다』(유학성), 『12·12이후에나 하나회로 분류됐다』(최세창)는 등 하나회의 의미를 퇴색시키는데 주력했다. 변호인단은 특히 79년 11월 인사는 중장급 장성이 대상이었기 때문에 소장인 전씨가 좌장인 하나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변호인단은 특히 10·26 박대통령 시해사건의 전모와 정총장의 방조혐의를 집요하게 따져 물으며 정총장 연행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특히 정총장 수사 실무자인 이학봉피고인에 대한 반대신문은 전체 1백30여문항중 무려 1백여문항이 10·26당시의 상황묘사와 당시의 수사상황등을 설명하는데 할애됐다. 정총장 내란방조사건이 「거사」를 합리화시켜주는 가장 큰 무기로 판단하고 있는 것. 그러나 이사건은 최근 법원이 재심을 받아들인 상태다.

한편 「읍소형」 변론도 등장했다. 최세창피고인은 독립운동가인 부친 해광 최윤동선생의 『국가와 민족을 위해 빛나는 인간이 되라』는 「훈계」까지 거론하며 정치와는 무관한 야전군인임을 강조했다. 변호인은 해광선생의 일기까지 참고자료로 재판부에 제출했다. 또 황영시피고인은 신문의 30%가량을 만주에서의 어린시절,입대 이유,6·25와 월남전쟁 때의 활약상등 자신의 전력소개에 할애해 눈길을 끌었다. 정영일변호사는 『순수군인으로서의 황피고인의 모습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변론사유를 설명했다.

한편 1백30여문항의 비교적 간단한 내용으로 반대신문을 마친 노씨는 총리공관 장악 및 수경사령관체포 지시등 자신이 직접관련된 혐의에 한해 반론권을 행사하는 소극적 방어전략을 택해 대조를 이뤘다.<이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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