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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대권경쟁/김병국 고려대 교수·정치학(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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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대권경쟁/김병국 고려대 교수·정치학(한국논단)

입력
1996.05.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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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에 어긋나는 상황이다. 민주국가라면 대권경쟁이 서서히 고개를 내밀 임기 후반부이다. 명망가와 중견정치인들이 자신의 비전과 철학을 국민에게 밝히고 차세대 리더로서 자격을 검증받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일 때이다.그러나 신한국당의 대권논의는 기이한 긴장과 침묵 속에 갇혀 있고 그 화려한 대권주자군은 머리를 숙이고 있다. 선거라는 정치시장에 내다 팔 「상품」이 개발되어야 할 시점일진대 여당은 오히려 후보논의를 단속하고 선두주자의 등장을 억제한다.

지난 총선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 상당수의 시민은 여와 야 모두가 탐탁지않았다. 그러다 최후 선택의 시점에 가서는 세대교체를 내세운 신한국당의 편에 섰다. 여당이 마음에 차서가 아니다. 지나간 개발연대의 세대로 세계화 및 정보화의 파고를 헤쳐나가려는 야당이 여당보다 더 불만스러워서였다.

○야당이 약하면

신한국당은 총선 이후 자신감에 차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에 대한 긍정적 평가보다 상대방의 한계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야권이 기존의 인물로 차기 대선에 나서는한 누구를 개혁정치의 「계승자」로 내세우건 간에 승리는 자신의 몫이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한국당이 차기의 문제를 공론화에 부칠 리 만무하다. 오히려 수뇌부의 눈에는 「조기」 대권경쟁이 선거결과에 별다른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서 권력누수만을 부추기고 후보자 선정에 대한 자신의 발언권까지 약화시켜 버리는 자충수로 보일 것이다.

반면에 신한국당 내의 차세대 주자군은 공론의 장에서 대권경쟁의 당위성을 역설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누가 나오건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차기 대선에서 치러야 할 야권과의 경쟁이 아니라 수뇌부의 지명을 놓고 여당 내에서 벌어질 후보경선이 차기 대권의 향방을 판가름할 결정적 순간이 되기 때문이다. 차세대 주자가 대권논의를 꺼리는 것은 당연하다. 수뇌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역시 여당은 야당이 강력할 때 건강해지는 것인가 보다. 건전한 대권논의가 정착하지 못하는 것은 좀처럼 비전과 명분을 찾지 못하는 야권의 한계 때문이다. 여와 야의 역학관계가 경쟁성을 상실하면서 여당 내의 대권논의가 긴장과 침묵 속에 갇혀버렸다.

한국에서 대권경쟁이 언제나 이러하였던 것은 아니다. 김영삼대통령이 지난날 온갖 질시와 견제를 이겨내고 민자당의 후보권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치열한 여야관계 덕분이었다. 그가 아니고서는 민주당 김대중총재의 카리스마를 이겨낼 수 없었기 때문에 노태우 전 대통령이 김영삼 대표를 후보로 선택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이다. 야당이 기존의 인물로는 대선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지 않다. 여기에 「마산행」과 같은 최후의 수를 놓고 수뇌부의 결단을 촉구할 강력한 대중적 정치인이 여당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까지 고려하면 차기 대권에 대한 공론화는 그 시기가 늦춰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당연한 것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공론화를 연기한다고 해서 차기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억제되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오히려 대권경쟁이 「음지」로 숨어버리고 대권논의가 「주간지」 수준의 기사거리로 추락할 위험이 농후하다. 아니 이미 그러한 기미가 보인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당위와 현실성

대권주자 중 일부는 국민에게 자신의 포부를 밝혀야 할 시점에 오히려 지구당 위원장이나 찾아가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게다가 언론에서는 「누가 성격이 원만한가」가 인물에 대한 평가의 전부가 되다시피 하고 「누가 누구와 친하다」가 여당내 역학관계를 결정하는 최대의 변수로 인식되는 실정이다. 무엇을 위하여 차기 대권을 꿈꾸는가 하는 철학과 비전 및 정책에 대한 논의는 어디서고 찾을 수 없고 정치인 개개인의 손익계산과 전략을 점치는 마키아벨리 식의 권력에 대한 논의만이 확산되고 있다.

민주주의가 한국사회에 착근하려면 대권경쟁이 공론화라는 「양지」로 올라오고 정책이 대권논의의 핵심주제로 떠올라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당위성이 신한국당 수뇌부의 마음을 움직일지는 미지수이다. 현실정치는 힘의 구조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당위」가 「현실성」을 가지려면 오히려 야권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 야당이 새로운 인물과 비전을 제시하면서 수평적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갖추어야 여당 내의 명망가와 중진이 각자 독특한 색깔을 내고 국민의 검증을 받는 기회를 확보할 수 있다.

야당은 「지역정권교체론」이라는 기이한 대안을 내놓기보다는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자기변신에 나서야 한다.<고려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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