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선관위가 공식발표한 15대총선 출마자들의 법정선거비용 신고내역을 살펴보면 흡사 한편의 저질 코미디를 보는듯한 기분이다.당선자들이 선거기간에 사용한 비용이라고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한 액수는 평균 6,000여만원. 법정한도액 평균치인 8,100만원에도 훨씬 못미쳤다. 불과 한달여전, 선거가 한창일때만 해도 지역에 따라 20억원을 쓰면 당선되고 10억원을 쓰면 떨어진다는 이른바 「20당 10낙」설에 비하면 그야말로 「소도 웃지 않을 수 없는」수치다. 당선자들은 『소문과 실제는 다르다』며 저마다 깨끗한 선거를 치렀다고 강변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소문이 사실임을 솔직히 인정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14일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있은 어느정당의 당선자세미나장. 사회를 보던 한 당선자는 『유엔에 가입된 전세계 180여개국중에서 수억원, 심지어는 수십억원씩을 선거비용으로 쓰는 국가는 아마도 우리나라뿐일 것』이라고 밑빠진 독에 물붓듯했던 총선때의 악몽을 되새겼다.
상당수 여야당선자들이 사석에서는 이번 선거에서 알토란같은 돈 수십억원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실토한다. 이들은 서슴없이 구체적인 돈의 사용처까지 밝힌다. 물론 이들의 「솔직함」에는 국민의 타락한 정치의식 때문에 자신들의 불법이 불가피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들의 설명은 금권선거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밝혀준다. 이들은 한결같이 자원봉사자를 가장한 유급운동원들의 인건비에 가장 많이 들었다고 지적했다. 일당 5만원에서 많게는 10만원에 이르는 이들 유급운동원들을 수백명씩 동원하지 않고는 선거를 치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개인홍보물 제작에도 수천만원에서 억대의 비용이 들었으며 합동연설회나 정당연설회등이 열릴때 동원하는 유세청중동원비용도 상당했다. 탈법행위라 숨어서 할 수밖에 없었던 향응비용도 엄청났다. 고가의 첨단장비인 점보트론이나 멀티비전을 임대한 후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지역에서 낙선한 한 정당후보자는 거물급인사들을 초청한 정당연설회를 한번 치르는데 청중 동원비등 행사비만 억대가 넘게 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당선자들은 물론 대부분의 후보자들이 법정비용을 준수한 것으로 당당하게 신고했다. 선관위의 선거비용실사는 말할 것도 없고 선거판 속사정을 잘 아는 국민여론 쯤은 전혀 두려워하거나 개의치 않는 배짱이다. 수억대, 수십억대의 비용을 8,000만원 선으로 절묘하게 짜 맞춘 이들을 두고 가히 신기에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감탄해야 할지, 아니면 양심마저 얼어붙은 이들의 사술을 나무라야 할지 판단이 쉽지않다.
누구나 뻔히 아는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사실 처럼 얘기하는 것이 바로 코미디의 본령이다. 알고도 속는 맛이 코미디의 묘미이다. 하지만 국민은 이번 선거비용신고 코미디에 웃을 수 없다. 결코 속을 수가 없고, 속여서는 안되는 것이 선거비용신고이기 때문이다. 깨끗한 선거없이 민주주의가 완성될 수 없다. 법과 현실을 조롱하는 거짓말 신고내역서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국민이 코미디 즐기듯 웃을 수 있겠는가.
94년 3월 마치 「민주주의의 완성」인양 호들갑을 떨며 통과시켰던 통합선거법이 후보자들의 각종 탈법행위앞에서는 한낱 휴지에 불과했다. 입은 풀고 돈은 묶는다고 했으나 돈을 묶은 줄이 썩은 동아줄이어서일까. 정치권 특히 여권이 기득권을 포기하는 결단없이는, 또 아직까지도 후보자들에게 손을 벌리는 유권자들이 있는한 「포니 수준보다도 못한 민주주의」라는 조소를 면키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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