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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TV문학관 「길위의 날들」(TV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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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TV문학관 「길위의 날들」(TV평)

입력
1996.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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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적신 절제와 상징의 미학/요란한 음악·기교 배제한 서정적 영상/서러움 억누른 대사·연기는 슬픔 더해무심한 철길, 눈 덮인 산길이 세상과 이어진다. 완행열차와 낡은 시외버스에 타고 있는 무수한 인간들이 웃음과 눈물, 체념과 외로움을 뿌리며 그 선을 따라간다. 길은 인간들의 사연에 의해 여러 색깔로 살아난다.

40대중반의 장기수 정순우(김영기 분)가 한겨울 교도소 문을 나선다. 10년만에 3일간의 휴가를 받은 것이다. 「신TV문학관」에서 그에게 주어진 「길위의 날들」(KBS1 12일 하오9시45분 방송·극본 김옥영, 연출 김홍종)은 칠순 노모(정애란 분)와 얼굴도 모르는 열살된 아들 욱이를 찾아가는 뜀박질로 시작된다. 고향(새터말) 가는 길은 멀고, 세상은 낯설기만 하다.

그가 길위에서 만나게 되는 세상은 삶의 피곤함과 불신, 탐욕과 인간소외들이다. 낡은 여인숙에서 몸을 팔며 살아가는 철이엄마는 대합실에서 아무 남자나 붙잡고 도망친 남편이라고 악다구니를 하고, 노인들은 분식집에서 김건모가 신나게 노래하는 TV를 물끄러미 본다. 도망간 남편을 찾겠다고 완행열차에 오른 20대 초반의 여자는 아이를 버리고 혼자 살기 위해 도망친다.

카메라는 주인공의 시선처럼 무심하다. 요란한 음악도, 기교도 없다. 돌아온 아들을 위해 콧노래 부르며 저녁을 준비하는 노모나 그런 노모를 절망시키고 다음날 새벽 큰절을 올리고 돌아서는 주인공, 떠난 아버지를 뒤쫓다 눈밭에 우두커니 서버린 욱이, 어느 누구도 서러움에 복받쳐 울부짖지 않는다.

아버지의 이불끝을 여며주는 아들의 손, 잠든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아버지의 손, 아들에게 닭고기를 뜯어주는 노모의 떨리는 손에는 슬픔이 절절히 배어있고 그냥 지나가듯 보여주는 화롯불 위에서 끓는 된장국, 눈쌓인 고향집 주위의 풍경들조차 애달프다.

이 드라마는 절제와 상징의 미학을 알고 있다. 절제된 대사와 연기는 가족들의 만남과 이별의 순간들을 더욱 절실하게 만들었고, 영상 하나하나에는 서정이 담겨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무심하게 보였던 에피소드들이 모두 주인공의 삶속으로 들어온다.

사실적이면서도 시적 영상이 살아있고 작가주의 정신까지 거느린채 인간존재의 의미를 묻는 한편의 로드무비 「길위의 날들」. TV에서 9년 동안 잃어버렸던 문학의 향기는 이렇게 가슴을 적시며 우리 곁을 찾아왔다.<이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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