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러운 5월 광화문네거리에 해공 신익희선생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이달의 위대한 독립운동가와 민족지도자로 해공이 선정된 것을 알리고 기념하는 뜻이다.그러고 보니 해공이 제3대 정부통령 선거를 불과 12일 앞두고 유세길의 호남선열차에서 급서한게 56년 5월5일이었으니 올해가 꼭 40주기가 된다. 온 국민의 비통속에 홀연히 떠났던 그가 이제 압제와 총검이 사라진 옛 함성의 거리로 되돌아와 깃발속에서나마 오가는 젊은이들을 이윽히 바라보고 있으니, 그 시절을 아는 사람들의 심사란 저절로 숙연해 질 수밖에 없겠다.
하지만 오늘의 젊은이들이 어찌 해공을 알 것인가. 타계 4년뒤 4·19혁명으로 그의 유훈의 결실이랄 수도 있는 반짝민주가 꽃피었지만 이내 군사독재와 개발연대에 밀려 오랜 동면을 강요당했으니, 해공이 한 평생 펴 보였던 독립·민주·반독재투쟁의 정신과 상징성을 제대로 전수받을 기회도 적었던 것이다.
그의 생애는 편의상 세 시기로 나눠 볼 수 있다. 국내와 망명지 중국의 임시 정부에서의 독립투쟁, 건국후 제헌 때부터 국회의장을 세번 연임하며 민주 의정의 초석을 다져놓은 일, 그리고 야당을 통합해 대표와 대통령후보로 나서 그 유명한 「못살겠다 갈아보자」 「썩은 정치 바로잡자」며 자유당 독재에 맞섰던 만년이다.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건 타계하기 불과 이틀전 한강백사장에서 가졌던 해공의 마지막 유세였다. 당시 160만 서울인구의 20%에 가까운 30만 인파가 백사장을 뒤덮었던 것이다. 한국적인 피플스 파워의 기원이란 바로 그곳에서 태동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유명했던 사자후 이틀뒤 그는 운명했고 그 10일뒤의 선거에서 해공에 대한 전국의 추모표가 185만8,000여표나 됐고 서울서는 살아있는 이승만대통령보다 8만표나 많은 28만4천표를 얻었던 것이다. 그게 민중들의 민주역량을 결집시킬 수 있었던 해공의 인품과 능력이었던 것이다.
그의 20주기때 당시 신민당총재였던 정치후배 YS는 추도사에서 그 때를 회상, 「새로운 민주역사의 새벽을 열었다」고 추념했었고, 당시 본보논설위원이었던 유광렬선생은 해공을 「상대편의 인격과 소신을 존중할 줄 알았던 반독재 반독선의 참으로 큰 사람」이라고 평가한 바 있었다. 그런 해공이 평소 군민일체와 함께 건군보다 더 어려운게 정군이라고 강조했고 청렴결백한 성품탓에 타계후 미망인에게 집한칸 남겨주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이 앞선다.
그가 살아남아 국가원수가 되었다면 군을 잘 다스려 쿠데타의 악순환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고 민주화실현도 훨씬 앞당겨 졌을 것이며, 전직대통령 두명이 천문학적 비리로 영어의 몸이 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도 없지 않았을까 생각되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지금도 그가 마지막 쓴 일기구절이 생각난다. 『오후 2시경 한강인도교옆 백사장에서 강연을 하였다. 청중이 약 30만명 모여 감명이 심다(=매우 크다는 뜻)했다』는 것이었다. 그 간결한 구절속에 번져나오는 해공의 큰 인품과 친근한 체취가 광화문의 깃발속에 지금 말없이 펄럭이고 있다. 그 무언의 메시지를 올바로 읽고 반성하며 계승·실천하는 건 오늘의 후학 지도자들과 다음 세대를 짊어질 젊은이들일 것이다.
그가 온 국민 모두의 절통함 속에서 타계한 날이 바로 어린이 날이었다는 것도 지금 와서 생각하면 결코 예사롭지 않은 우연이 아니겠는가. 해공이 간지 40년뒤인 올 5월6일에는 청렴·강직한 성품과 남다른 사명감으로 언젠간 현대의 군신으로 추앙받을만한 한신장군이 세상을 떠났다.
곰곰 생각해보면 두분 모두 오늘날 늙은 지도자들조차 연거푸 그렇게 목말라 하는 대권을 차지하지도, 군의 상징이라는 참모총장이 되지도 못했지만 오히려 오늘날 오욕의 대명사로 전락한 과거의 일부 국가원수나 정치군인들에 비해 그 얼마나 자랑스럽고 향기로운 여운을 남기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런 인물과 사표들로 말미암아 어린이와 어버이날이 있는 올 5월이 더욱 뜻깊어지고 있지 않는가.
옛 한강백사장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길이 없어도 인물들이 남긴 인품과 정신은 결코 사라질 수 없음을 생각케되는 5월이다.<수석논설위원>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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