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아닌 과학”무기로 변혁운동/민족문학과 두바퀴 이루어 반일 운동의 한길로/3·1운동이후 새로운 지평모색/「승산」 있는 세계관으로 ML주의 수용/유미주의 대신 「역의 예술」동조/PASKULA·염군사 합쳐 KAPF조직객: 3·1운동의 민족사적 경험이 문학에 어떤 굴절을 가져왔느냐, 그런 식의 질문은 조금 거칠다고 보십니까. 계몽적 이성을 전제로 출발한 선생의 논법이기에 당연한 질문 아니겠습니까.
주: 일반적으로 말해 육당·춘원류의 계몽주의, 이에 맞선 창조·폐허파의 문학 내면화(전문화)의 흐름, 김소월에서 그 원형을 획득한 토착적 고층의 흐름등의 발현이 일단 그 나름의 유형이랄까 틀을 이루었다고 볼 것입니다. 큰 범주에서 보면 이들 모두가 계몽적 이성에 포섭되는 것. 문학 내면화를 두고 제2계몽주의라 한 것도 그 때문이지요.
객: 그렇다면 단재의 아나키즘같은 것은 제3의 계몽주의라 하겠습니까. 내 나름으로 제3계몽주의를 정리한다면 「국민주의(민족주의)·제국주의·자본주의」대 「아나키즘·허무주의·공산주의」의 대응도식이 되겠는데.
주: 통틀어 「이성의 힘으로 세계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신념 위에 선 사상들이라 범박하게 말해 볼 수 있겠지요.
객: 허무주의도 그러할까요.
주: 「절대적인 것」과 대립할 때, 그 초월방식의 하나로 극단화한 것이 허무주의 아닐까. 적극적 허무주의랄까. 앞의 지평이 떠오르지 않아 마음 아득할 적이면 저는 단재의 말을 가만히 외곤 하지요. 「금강의 경이 아모리 좋을지라도 기아의 눈에는 일시의 반만 못하며 솔거의 화송이 아모리 명작이라 할지라도 익수자의 눈에는 일편의 목판만 못하며 살도 죽도 못하게 된 조선민중의 귀에는 모든 미려한 가극과 소설의 이야기가 백두산 속 미신귀인 조선생의 강신필만 못하리니…」(「낭객의 신년만필」, 동아일보 1925.1.2). 아나키즘이 허무주의와 지척간에 있지 않습니까. 죽도 살도 못하는 자리, 죽고 사는 길이 동일한 자리에 선 사상이 아닐 수 없지요.
객: 그만큼 현실성이 없달까 공상에 가까운 것이 아나키즘이라는 뜻이겠군요.세계 어느 곳에도 아직 아나키즘이 실현된 데는 없으니까.
주: 엥겔스의 유명한 명제 「공상에서 과학으로」가 나올 수 있었던 빌미도 이와 관련하여 설명될 수 없을까. 이성의 힘으로 세계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이 한갓 유토피아가 아니라 과학일 수 있었다는 것. 이것만큼 가슴 설레는 것이 달리 있었을까.
객: 엥겔스가 말한 그 「과학」이라는 것도 기껏해야 유토피아의 일종이었음이 소련 해체로 자명해진 마당이라면 대체 그 과학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주: 조급하게 판단할 수 없지 않을까요. 역사의 어느 단계에서 볼 때 공산주의가 「과학」으로 보였던 것이니까. 거기에 이르는 과정의 한 단계를 국가사회주의라 불렀지요. 소련의 성립이 그것. 그 소련의 해체란 실상 공산주의와는 무관한 국가사회주의 제일단계의 해체라 볼 수 없을까.
객: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유토피아사상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휩쓸렸다는 점이겠는데.
주: 그럴만한 이유가 분명 있었으니까. 문제의 발단은 시민사회, 곧 국민국가에 있지 않았던가. 경제적 이해관계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바로 국민(nation)이었고, 자본제 생산양식에서 시작된 경제적 이해단계(욕망) 자체 내에서 조정하는 장치로 국가가 상정되었던 것. 헤겔은 근대시민사회의 이 욕망체계를 국가가 조정할 수 있다고 믿었지요. 그러나 매우 불행하게도 그 기대는 적중되지 않았지요.
국가가 조정하기는커녕 시민계급(부르주아) 편에 서서 그것을 조장, 완성하기 위해 노동계급을 철저히 탄압하는 꼴이 벌어지고 말지 않았던가.
객:제자인 마르크스가 스승 헤겔을 두고 거꾸로 선 변증법이라 비판하고 나섰던 이유도, 결국 이 사실에 관련된 것이겠군요. 인간의 유적 본질(사회적·인륜적)과 개인의 사적 욕망(시민적)을 영원히 분리시키는 기능을 근대국가가 감행하고 있었던 것. 이를 이론화한 것이 「자본론」이며 노동력 상품론이겠고….
주: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의 이론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 현실감각에 있었던 것. 시민사회가 세운 근대국가가 대포·기관총을 앞세워 식민지 개척에 혈안이 되어 있지 않았던가. 노동자탄압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것. 식민지측, 노동자측에서 보면 생사의 문제였던 것. 마르크스사상 및 그 운동이 현실적 힘을 가지지 않을 수 없지요.
객: 이론이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도 그 때문이겠군요.
주: 루카치는 자신의 불세출의 역작 「역사와 계급의식」(1923)의 입구에다 마르크스의 명구를 세워 놓았지요. 「지금까지 철학은 세계를 여러 방식으로 해석했으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라고.
객: 잠깐, 계몽적 이성의 처지에서 보면 마르크스주의도 같은 범주 아닐까. 이른바 근대성이라는 자리 말입니다. 선생의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1973)가 카프문학에서 출발, 그 내면화의 과정 탐구로 일관되어 있는데, 말을 바꾸면 근대문학의 근대성이란 카프문학에서 발단되고 그 속에 수렴되는 것입니까?
주: 설명모델의 하나로 카프문학을 탐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카프문학을 가운데 놓고, 그 위로 거슬러 올라가기, 또 아래로 훑어 내려오기의 탐구라고나 할까.
객: 민족주의에 절망한 단재가 아나키즘으로 달려간 것이 1923, 24년 무렵 아닙니까. 그 조급성이 허무주의를 비껴갈 수 없었다면 당초부터 「과학」이라 부른 마르크스주의(계급사상)는 그만큼 승산있는 세계관이 아니었겠는가. 오늘의 처지에서 보면 그것 역시 한 설명모델(허무)이지만 적어도 그 당대에는 가장 현실적인 감각이었다….
주: 카프문학을 말하기 전에 당시의 여론을 잠시 엿보면 어떠할까. 3·1운동 이후 우리의 나아갈 지평은 무엇인가. 일본 역시 조선통치의 새 방향 모색에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요시노 사쿠조(길야작조)의 조선자치론을 비롯, 일본의회에서도 각론이 분분했던 것. 드디어 일본정부는 예비역 해군대장 사이토(재등)를 현역으로 복귀시켜 총독으로 임명했으며, 이른바 문화정책을 한다는 명분으로 부임했던 것.
객: 육군 2개 사단을 증설한 것도 문화정책에 드는 것일까요.
주: 역대 총독 중 제일 오래 통치한 자는 사이토이지요. 16년간. 두 차례에 걸쳤지요. 광주학생사건 수습차 다시 부임할 정도였으니까. 그의 통치방식은 헌병정치에서 살짝 빗겨난 경찰정치였던 것. 본국의 내무대신 출신의 인사를 정무총감으로 기용했던 것.
객:염상섭의 소설 「만세전」(1924)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군요. 일본유학에서 귀국하는 주인공이 그의 형을 만나는 장면. 소학교 훈도인 형은 금테모자에 망토를 두르고 칼을 찼지 않았던가. 「도금을 물린 검정 환도 끝이 다리에 터덜리며 부딪는 것을 왼손으로 꼭 붙들고…」. 기괴망칙한 통치방법 그게 헌병정치 스타일이었던 모양.
주: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일본은 세계 4위의 강국으로 부상했지요. 이에 대응하기 위한 우리의 방식은 어떠해야 했을까. 우리 사회의 나아갈 지평이 떠오를 때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지요.
객: 선생이 어느 글에서 지적한 문학장르 선택의 문제가 이에 대응된 것이겠지요. 당대 사회의 나아갈 지평이 떠오르지 않으면 산문(소설)이 씌어질 수 없다는 것. 시적인 것(시, 수필등)만이 무성할 뿐이라는 것. 삶의 순간적 단편적 체험만이 가능하다는 것. 「창조」(1919), 「폐허」(1920), 「장미촌」(1921), 「백조」(1922), 「금성」(1924) 등의 동인지의 글들이 시적인 환각으로 충만한 것도 이로써 설명될 수 있겠네요. 그렇다면 진짜 산문(소설)은 언제부터 출현할 수 있었을까. 이 물음의 해답이 쉽사리 나오네요. 당대 사회의 나아갈 지평(응전의 전망)이 어느 수준에서 떠오르지 않으면 소설이 등장할 수 없다. 가령 춘원의 「무정」(1917)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국권상실 이후 당대 사회의 나아갈 지평이 어느 수준에서 떠올랐음과 관련된다? 선생 전공인 문학사회학 쪽의 설명방법이겠군요. 그렇다면 3·1운동 이후 당대인의 나아갈 지평이 떠오른 시기는?
주: 1925년 전후로 볼 수 없을까. 조선공산당과 카프(Korea Artista Proletaria Federation·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가 결성된 해이기도 하니까. 거기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볼까요. 유미주의를 표방하던 「백조」지가 후기 동인으로 가입한 김팔봉에 의해 서서히 파괴되기 시작하지요. 서울 중심의 「백조」(휘문, 배재고보 중심) 동인 박종화 박영희 등이 김팔봉과 더불어 「력의 예술」에 동조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PASKULA(박영희 안석영 김형원 이익상 김팔봉 김복진 연학년, 1924)를 형성했으며, 다른 한 편 무명의 신인인 이적효 심훈 송영 김영팔 등에 의한 염군사(염군사·1922)도 조직되었던 것. 이러한 신경향의 문학세력 두 단체가 주축이 되어 KAPF가 조직된 것. 카프의 운동으로서의 이념이 뚜렷해진 것은 제1차 방향전환(1927.9)이며 이 조직이 볼셰비키화한 것은 제2차 방향전환(1931). 물론 카프는 직·간접으로 소련의 RAPF, 일본의 NAPF와 연결된 조직체로 볼 것.
객: 저러한 카프의 성립이야말로 당대 사회의 지평 확인에서 가능했다?
주: 「민족운동과 사회운동―그 차이점과 일치점」(동아일보 1925.1.2)이라는 설문에서 개진된 한용운 주종건 김찬 최남선 조봉암 현상윤 등의 견해는 한결같이 양운동은 서로 부합한다는 것, 또 부합하도록 노력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간회(1927.2.15)가 그런 의견의 결실이었던 것. 요컨대 민족주의와 계급주의라는 두 이데올로기가 지평 위에 뚜렷이 떠올랐던 것. 이로부터 산문계(소설, 평론 기타) 예술이 가능했던 것.
객: 민족주의(시민계급성)문학과 계급주의(무산계급성)문학의 두 바퀴가 우리 근대문학의 이념적 지향점이었다면, 이 둘 중의 우열이랄까 선택의 과제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각자의 출신성분이나 신념이나 취향에 관련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기준이라도 있는 것일까.
주: 핵심에 닿은 질문. 계몽적 이성이 지닌 어쩔 수 없는 배리라고나 할까. 거시적으로 본다면 역사에 대한 조급성이 그 기준이었다고나 할까. 각자가 싸워야 될 대상(타자)이 「상대적인 적」이냐 「절대적인 적」이냐의 선택문제로 수렴되는 것.
객: 선생께선 할 말이 많은 모양이군요.<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국문과 교수>김윤식>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