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순 두달만에 다시선 무대 “이게 진짜 예술”/정부비판 처음들어 지난 총선 엄청난 충격/어느덧 5개월째… “이 행복 지켜야지” 각오 북한의 무장군인 판문점 연쇄투입으로 온 「남조선」이 술렁거리고 있었던 4월초순. 주말이면 방송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을 빼놓지 않고 볼 정도로 서울생활에 재미를 붙여 가던 신영희씨는 남다른 감회에 잠겼다.
전쟁이 일어나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이 순식간에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은 물론 남편과 두 아이들 모두가 「배신자」라는 명목으로 극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떨림 때문만은 더더욱 아니었다. 신씨에게는 북한에서 시도 때도 없이 하달되던 그 지긋지긋했던 「준전시태세」명령, 『전쟁이 임박했으니 전 인민은 미숫가루를 충분히 준비하라』는 등의 터무니없는 다그침이 너무도 선명히 떠올랐을 뿐이었다.
『미숫가루, 전쟁, 교시, 총화…. 북한에서 살았던 30여년의 세월이 응집된 단어들이 떠오를 때마다 「내가 분명 남한에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곤했습니다. 그럴 때면 창문을 열고 길거리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의 현란한 불빛을 보고 안심을 하곤 했습니다』
서울에 온 지 벌써 4개월 보름째. 밤새도록 TV를 보고, 가끔은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 보다 훨씬 맛있는 서울냉면」을 즐길 정도로 서울 생활에 적응한 신씨이지만, 이렇게 잠못드는 밤이 간혹 찾아왔다. 다음달이면 금융회사에 취직한다며 그동안 덮어두었던 책들을 뒤적이는 남편, 『평양보다는 런던에서 살자』고 조르던 아들 창혁이, 「남조선 기자」들이 질문을 할 때면 엄마 뒤쪽에 숨던 딸 송희. 그런 밤이면 신씨는 이들의 잠자는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본다.
아침에 일어나면 신문부터 본다. 1면에서부터 조그만 기사도 빼놓지 않고 다 읽는다. 자신이 무용배우였던 만큼 문화·예술쪽은 더욱 꼼꼼히 읽었다. 영국에서 3년여동안 살아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문화가 그리 낯설지는 않지만, 그래도 북한 영방예술단에서 알게 된 귀순자 김용씨, 「북한 인민들의 우상」이었던 림수경씨 등 낯익은 사람들의 소식 등이 실려 있어 더욱 반갑다.
TV는 더욱 재미있다. 드라마를 어쩌면 저렇게 늘 새롭고 아기자기하게 만들 수 있을까 싶다. 북한에서는 거의 매일 당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내용의 드라마만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남한의 여자 탤런트들은 「인물」과 「체격」에 대한 엄격한 심사를 거쳐 무용배우가 된 자신이 보기에도 무척 예쁘다. 이젠 탤런트들의 이름까지 외우게 됐다. 배종옥, 고두심, 옥소리,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을 정도로 깜찍하기만 한 김희선….
신씨 가족은 강남의 한 아파트에 임시거처를 마련했다. 『정확히 어디 사느냐』는 질문에 『글쎄, 아직 서울의 동서남북을 잘 몰라서…. 다리를 건너 가는 것은 분명한데…』라고 말끝을 흐린다. 확실한 대한민국 국민임을 증명하는 주민등록번호는 아직 없다.
신씨는 서울 생활을 시작한 지 2개월만에 자신의 본업인 무용을 다시 할 수 있었다. 89년 남편과 애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어렵게 선발된, 북한 처녀들의 선망의 대상인 만수대예술단을 그만둔 지 7년여만에 서울시립가무단의 뮤지컬 「시집가는 날」의 주인공인 갑분이 역을 맡게 됐다.
전국 10여군데를 돌아다닌 공연은 15일 성황리에 끝났다. 그동안 말로만 듣던 인천이며 부산 대구 광주 속초 등을 구경했다. 서울과 이곳들을 비교해 보는 것도 즐거웠지만, 무엇보다 다른 단원들과 가깝게 지내며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평양에서 연습하던 것과는 정말로 달랐어요. 개인의 창의력을 존중하는 연습 방식, 손가락 하나하나에도 표정을 넣으려는 단원들의 노력 등이 「이게 진짜 예술이구나」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더더욱 놀란 것은 단원들이 쉬는 시간에 아무 부담 없이 자기의 고민이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어요. 북한에서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죠』
신씨가 이런 식의 「격의없는 대화」에 또한번 놀란 것은 지난 총선때였다. 후보들은 저마다 자기의 포부와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을 거침없이 말하고 「유권자들」(신씨는 이 말을 남한에 와서 처음 들었다)은 자기 마음에 드는 후보를 선택하는 선거의 모든 것이 「충격」 그 자체였다.
『북한에도 물론 투표는 있습니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등을 뽑는 투표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형식적인 것일 뿐 인민들은 의무적으로 찬성표를 던져야 합니다. 이곳에서 느꼈던 개표방송때의 가벼운 흥분이나 당선자들의 환호 등은 애시당초 기대할 수 없는 것들이죠』
하지만 신씨의 서울생활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 다음달이면 두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위한 절차를 밟아야 하고 남편이 벌어오는 수입을 알뜰하게 관리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생활방식을 체득하자면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자유가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서 열심히 살 각오를 새삼 다지고 있다.
때로는 북한에 두고온 형제자매들 생각이 나겠지만, 어려운 결정끝에 찾아온 서울이기에 행복하게 살기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불탄 청바지 아시나요/90년대 들어 젊은층서 선풍/급기야 “없애라” 김정일 교시/여성사이 유행 「끌신」도 같은 운명
신영희씨는 「멋쟁이」다. 어려서부터 무용으로 단련된 곧은 자세와 차분하고 단정한 옷매무새에서 세련된 분위기가 풍긴다. 수년간의 해외생활로 몸에 배었겠지만 신씨의 멋스러움은 평양에도 패션과 유행의 바람이 불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신씨는 『93년까지는 청바지를 입은 「멋쟁이」커플이 평양 대동강변을 거닐며 데이트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북한 젊은이의 「멋내기」풍습을 전했다.
90년대 북한에서 최고로 인기를 끈 패션은 청바지. 재일교포 등 해외에 다녀온 사람들을 통해 북한에 소개된 청바지는 젊은 층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질기고 편한 청바지는 20대 뿐 아니라 30∼ 40대 장년층에서도 「실용패션」으로 크게 확산됐다. 신씨는 『손질이 쉽고 튼튼한 청바지를 입어본 사람들 중에 좋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고 당시의 호평을 전한다.
외화상점(외제상품 가게)에서는 중국 소련 등지에서 수입한 청바지가 날개돋힌 듯 팔렸다. 가격은 15∼20원선. 막 입을 수 있는 평상복바지를 15원이면 살 수 있으니 그리 비싼 편도 아니다. 청바지 기성복 수요가 딸리자 상인들은 중국에서 청바지의 원단을 들여와 진열대에 내놓기도 했다. 이를 구입해 바지를 직접 만들어 입는 젊은이도 많았다.
청바지가 급속도로 확산되자 94년 당에서는 「청바지는 미 제국주의가 식민지 침공을 위해 퍼뜨린 잔재」라는 대대적인 비판을 시작했다. 급기야는 『청바지를 모두 없애라』는 김정일의 교시가 내려왔다. 청바지는 모조리 압수돼 불태워지거나 잘게 잘려졌다. 그러자 평양 주민들 사이에서는 「가뜩이나 모자라는 처지에 아까운 바지까지 못 입게 한다」는 불평이 자자했다.
「분의갱유」사태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북한에서는 「자본주의」적 복장이 당차원에서 비판받는 경우가 많다. 80년대 후반 이후 미니스커트를 입거나 광택이 나는 재킷이나 상체를 드러낸 대담한 복장을 한 연예인이 북한 TV에도 거리낌없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씨는 『북한여성들의 「패션욕구」는 생각보다 높은 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당에서 허용하는 복장은 너무 「점잖아」 불만을 사고 있다는 것이다.
청바지와 더불어 비판받았던 「끌신」은 남한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도 유행한 바 있는 슬리퍼형 구두. 신발 뒤 꿈치 부분이 없어 살짝 끌면서 걸어야 하는 「끌신」은 90년대 들어 북한의 신세대 여성들 사이에 매력적인 패션구두로 크게 인기를 끌었다.
「끌신」이 유행하자 당에서는 이를 「퇴폐적」, 「수정주의적」 복장이라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점에서 「끌신」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신을 갖고 있어도 신고 다닐 정도의 「용기」를 지닌 북한여성은 없었다. 한때 평양 여성들 사이에 유행했던 「바지치마」도 같은 전철을 밟아 사라졌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복장단속이 느슨한 편이라는 게 신씨의 얘기다. 비교적 자유스런 옷차림에 커다란 리본이 달린 망사핀으로 뒷머리를 쪽진 「멋쟁이」여성이 평양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남성의 경우에도 예전에는 머리를 귀 뒤로 바짝 치켜 올려 깎도록 했으나 최근에는 귀를 살짝 덮는 「장발」도 허용되고 있다고 한다.
최근 북한 여성들의 「멋내기」품목은 외화상점에서 구할 수 있는 금속제 가락지, 목걸이 등 액세서리이다. 귀고리도 선망의 대상이지만 「수정주의」적 복장으로 비판받을 여지가 많아 아직 일반 여성들 사이에서는 금기시되고 있다.
신씨는 귀고리를 하기 위해 귀를 뚫었다. 북한에서가 아니라 영국에서다. 신씨는 그러나 『북한에서도 만수대예술단에서 공연할 때 귀고리를 건 적이 있다』고 말했다.
◎대답못한 한자이름/당서 민족주의 강조 점차 사라져/「한자투음사용 한글이름」 대부분
북한에서 자신의 이름을 한자로 알고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자신의 성인 「신」이 한자로는 「납 신」이라고 알고 있는 신영희씨는 『85년 남북한예술단 교환공연 때 서울에 왔다가 남한의 기자들이 이름을 한자로 어떻게 쓰느냐고 물어보았다. 그 때는 어떻게 쓰는지 몰랐다. 평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물어보았더니 「납 신(신)」자라고 가르쳐주었다. 본관이 평산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고 말했다.
남한에서는 한자이름을 사용하지만 북한에서는 차츰 한자 이름이 사라지고 있다. 당이 「민족주의적」차원에서 한자 사용을 권장하지 않아 한자이름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한자이름이 필요할 때는 중국 등을 방문할 때 입국자 명부에 이름을 기입하기 위해서 정도이다. 따라서 많은 일반 노동자들은 자신의 한자이름을 모르고 있고 한자이름을 물으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남한의 언론이 북한인사를 보도할때 한자이름을 몰라 애를 먹는 경우가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북한의 장·노년층은 한자세대여서 한자의 의미를 염두에 두고 자녀의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요즘 젊은 부부들 중에는 아예 한글로만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남한에서와 같이 예쁜 순수 우리말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사용돼온 한자투의 음을 그대로 사용해 한글로 이름을 짓는 것이다.
30대인 신씨 부부도 아들 창혁(9), 딸 송희(6)의 이름을 한자로 짓지 않았다. 신씨는 『남편과 상의해 그냥 부르기 좋게 지었다』면서 『가족돌림자인 「혁」자를 넣어 아들의 이름을 지었으나 한자이름은 아예 짓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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