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많아 답답 생계·교육문제 걱정10년만에 다시 찾은 서울은 첫 느낌부터가 달랐다. 화려한 거리 구석구석이 더이상 거짓된 것으로 여겨지지가 않았다. 이제 열심히 살아볼 만한 도시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만수대예술단 소속 무용배우였던 신영희씨가 10년전 「서울 간다」는 통보를 받은 것은 남북한 예술단 교환공연 행사를 불과 한달여 앞둔 85년 8월께. 구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2회 세계청년축전 참가후 남포 서해갑문 건설 노동자들을 위한 공연을 위해 숨가쁘게 움직이던 중이었다.
신씨는 이후 평양 고려호텔에서 열흘간의 엄격한 합숙훈련에 들어가 포크와 나이프 사용법, 음식을 먹으면서 조금씩 남기는 법 등 「서울 생활」에 필요한 요령들을 배웠다.
그러나 막상 꿈에 부풀었던 서울에 와보니 자동차가 많은 것만이 언뜻 눈에 들어왔을 뿐 다른 것들은 도대체 보이지 않았다. 『서울에서 공연이나 행동중에 실수하면 나중에 엄격한 처벌이 있을 것』이라는 중앙당 선전부의 사전 엄포때문이었다. 동행한 북한 기자들도 『속지 말라. 저 화려함 뒤에는 차마 못 볼 빈곤이 도사리고 있다』고 부추겼다.
신씨는 『일행들이 3박4일간의 일정을 「무사히」마치고 판문점을 통과하는 순간 대부분이 통곡했다. 아무 일 없이 북조선에 돌아온 것이 너무나 기뻤고, 남조선에서는 숨 조차 못 쉴 정도로 긴장했다. 남한은 도저히 살 수 없을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남편따라 3년여의 영국 생활을 겪으며 여러 경로를 통해 남한의 실상을 알게 되자 신씨의 태도는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남편이 『남한에 가서 살자』고 말했을 때 펄쩍 뛰었지만 『고향에 계신 부모형제만 없다면 당장 서울에 갈텐데…』로 바뀌었다. 그리고 결국 지난해 12월 일가족의 서울행을 결심했다.
『서울에 와서 처음에는 밤새도록 TV만 봤습니다. 같은 것만 반복하는 북한 TV와는 달리 거의 매일 새로운 내용이 방영되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했고, 남한의 여자 탤런트가 북한 탤런트보다 잘생긴 것 같아 「남남북녀」라는 말이 거짓이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물론 신씨가 겪고 있는 서울 생활의 모든 것이 보랏빛 일색인 것만은 아니다. 우선 거리에 차가 너무 많아 답답하다. 무엇보다 생계 대책과 아이들의 교육문제가 지금부터 신경이 쓰인다. 김포공항에 도착한지 이제 겨우 4개월을 넘긴 신씨에게 본격적인 서울생활은 지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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