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 아직 내전흔적속 도시기능 점차 회복/회교시민들 옛집서 가족상봉 감격/축배·자유만끽인파 밤낮없이 북적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전은 정말 벌어지지 말았어야 했다. 한때 다정한 이웃이었던 세르비아계와 회교도,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이 끝없이 벌인 살육전은 지난 4년간 20여만명의 희생자와 200여만명의 난민을 초래한 탈냉전이후 최악의 민족분규를 연출했다. 그러나 끝이 날 것 같지 않던 보스니아 내전도 미국을 비롯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군사개입으로 이제 질곡의 긴 터널을 벗어나고 있다. 포격으로 불탄 건물과 무너진 아파트, 곳곳이 묘지로 변한 전쟁의 깊은 상흔을 제외하면 오랫동안 숨통이 조여있던 수도 사라예보는 평상을 되찾고 있다.
동서로 흐르는 밀리아스카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갈라졌던 사라예보는 다시 하나가 됐다. 밀리아스카강 북쪽지역에 모여살던 회교도·크로아티아인들은 지난달 19일 전쟁발발 4년여만에 처음으로 남북을 연결한 「브라트스트바 이 에딘스트바」(형제와 통일)다리를 건너 세르비아계 점령지역이었던 그라바비차에 들어갔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였던 이 다리가 이름대로 헤어졌던 형제들이 만나는 통일로로 변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난리통에 그라바비차를 떠나야 했던 회교도 필리나 브라차할머니(65)는 『생전에 이런 날이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며 『다시 가정을 찾아준 나토군에 감사한다』고 감격해했다. 또다른 회교도는 『우리집을 무단점거했던 세르비아인들이 떠나면서 방화하는 등 몹쓸 짓을 저질렀지만 집을 되찾고 떠돌이 생활을 청산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말했다.
회교도와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등 여러 민족이 함께 모여사는 바람에 「유고속의 소유고」로 불렸던 사라예보는 지난해 12월14일 조인된 데이턴 평화협정에 따라 회교도 세상으로 변했다. 밀리아스카강 남쪽지역과 사라예보외곽 산악지대에 굳건한 진지를 구축하고 사라예보를 완전 봉쇄했던 세르비아계가 2월24일 보고스차를 시작으로 일리차와 그라바비차등 5개 외곽지역에서 철수했기 때문이다.
사라예보 서쪽 바스카르시아의 회교도 거리는 다시 활기로 가득 차고 있다. 바스카르시아 지역을 상징하는 회교탑 「세빌르보」주변에는 차도르를 쓴 여인들이 바쁜 걸음으로 지나쳤고 인근 회교식당에는 키틀레트요리에 「블라타나」와인을 곁들여 축배를 드는 시민들로 소란스러웠다.
또 전쟁와중에 근근히 명맥을 유지해온 기념품상점도 다시 찾아올 관광객을 맞을 채비에 분주하다. 기념품상 주인 아부도첸 파라(45)는 『95년 5월만 하더라도 너무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런데 앞으로 이곳을 가득 채울 자유로운 공기는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일 것』이라며 들떠있다.
사라예보는 밤의 생활도 되찾았다. 평화과정이 무르익어 가면서 사라예보의 티토거리 뒷골목에 자리잡은 「비비」디스코텍은 17∼18세 가량의 젊은이들로 흥청거렸다. 남자친구와 함께 온 아이라 바이리미(17)는 『지난해말부터 주말이면 친구들과 이곳에 온다. 병상에 누워있는 부모와 쉼없이 터지는 폭발음, 뒷골목을 이리저리 피해다녀야 하는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인근에 있는 당구클럽도 통금시간 직전까지 열기로 가득차 있었다.
사라예보는 평화협상이 본격화한 95년 10월까지 거의 3년6개월동안 외부세계와 막혀있었다. 밖으로 통하는 길목마다 세르비아계 저격수들이 도사려 있었고 사라예보 공항에는 인도적 목적의 유엔수송기외에 어떤 항공기의 이착륙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전기와 수도, 가스의 공급이 재개된 것도 불과 몇달 전부터였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도 버텨온 보스니아 회교도는 유고의 어느 민족보다 피해의식에 젖어 있다. 유고연방의 다른 5개 공화국이 민족명칭에 따라 국명을 지을때 보스니아는 지명에서 명칭을 따왔다(헤르체고비나는 15세기 이 지역의 수령이 신성로마황제로부터 헤르초크(공작)를 수여받은데서 연유). 유고 연방수립시 보스니아내에는 회교도가 가장 많은 160만, 세르비아계가 130만, 크로아티아계가 80만명정도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 회교도들은 정치 주도세력에서는 철저히 배제돼 왔다. 회교도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냈을 때 내전은 터졌고 이제 데이턴평화협정으로 국제사회로부터 하나의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인정받게 됐다. 그러나 그 대가는 너무나 엄청났다.
『보스니아내전에는 승자가 없었다. 다만 평화만이 승자였다』 데이턴협정에 대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의 평가다. 보스니아내전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말이다.<사라예보=이진희 특파원>사라예보=이진희>
◎내전에서 데이턴협정까지/92년 독립선언,회교세계 전쟁유발/휴전결렬 수차례 4년간 20여만 희생/나토 강력 개입으로 95년 전면휴전
보스니아에 평화를 심은 데이턴 평화협정 뒤에는 숱한 희생과 재산피해, 휴지조각이 되고만 수많은 휴전협정이 깔려있다.
92년 4월 보스니아의 독립선언으로 발발한 회교도와 세르비아계간의 충돌은 해묵은 민족·종교문제와 맞물리면서 보스니아 전역을 피로 물들였다. 세르비아계는 인접한 세르비아공화국의 군사지원에 힘입어 93년초 영토의 70%이상을 차지했으며 회교도 주민을 대량학살 혹은 추방하는 인종청소를 단행했다. 이러한 반인륜적 범죄행위는 회교도측도 자행, 모두가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가 된 전쟁의 비극을 되풀이 했다.
참상을 보다 못한 서방의 중재로 휴전은 성립되지만 서로간 증오의 벽을 넘지 못해 깨지기를 거듭했다. 「휴전―결렬」의 악순환 고리를 끊은 것은 미국이 주도한 북대서양 조약기구(나토)의 무력이다. 나토군은 95년 8월말부터 세르비아계 진지에 대한 대대적 공습을 단행, 교전 양측간 「힘의 균형」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틈을 탄 회교·크로아티아계는 빼앗겼던 영토의 3분의 1을 되찾으며 전세를 뒤집어 나갔다. 결국 세르비아계는 95년 9월 국제사회의 압력에 굴복, 전면휴전을 받아들임으로써 사라예보를 비롯한 보스니아에서의 총성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어 그해 12월14일 내전당사자들간에 미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이 협정에 따르면 보스니아는 현 국경선에서 한 국가로 통합하되 회교·크로아티아연방이 영토의 51%, 세르비아계가 49%의 통제권을 갖는다. 또 각 내전세력은 병력을 600마일 전선에서 4씩 철수하고 궁극적으로 공정한 선거를 통해 사라예보를 수도로 하는 하나의 정부를 구성한다. 이를 감시하기 위해 유엔평화유지군을 대체한 나토평화이행군(IFOR)이 보스니아 전역에 배치됐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국제기구의 감시하에 전지역에서 자유총선을 실시하고 새 의회가 각 민족의 공존을 보장할 헌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10월께 보스니아에 새 정부가 출범하고 6만명의 평화이행군은 철수한다.
◎세계포격에 두다리 잃은 알리야 판두라씨/“맘껏 숨쉴수 있어 기뻐… 권력욕이 내전원인”
93년 7월 세르비아계의 포격으로 부상,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알리야 판두라(22)는 보스니아내전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는 산증인이다. 사라예보 중심가에 위치한 부친 소유의 레스토랑으로 날아든 포탄에 두다리를 못쓰게 된 그에게 지난 2년8개월여동안의 활동 공간은 방 두개가 고작인 아파트가 전부였다. 건강한 사람들도 살아남기 힘든 판에 거동이 불편한 그는 세르비아계 저격수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밖으로 나갈 수 있어 살 맛이 난다』 알리야는 마음놓고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게 된 사실을 가장 반겼다.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도 피란민용 임시거처다. 세르비아계 진지에서 쏟아지는 총탄을 피해 겨우 옷가지만 챙겨 빠져나와야 했던 집을 잃고 온식구의 생계가 달렸던 레스토랑마저 파괴된 후 알리야 가족은 실의의 나락에 빠져들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절망은 희망으로 자리바꿈하고 있다.
하지만 두다리와 함께 그의 청춘을 고스란히 앗아간 내전이 왜 발발했는지는 알리야에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외부세계에는 전쟁이 이질적인 종교문제로 발생한 것처럼 알려져 있는데 정교회와 회교, 크로아티아계가 지난 수백년동안 아무 문제없이 다정한 이웃으로 살아왔다』고 그는 강조했다.
그가 진단한 내전의 원인은 명쾌했다.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권력욕에 종교와 민족을 끌어들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 역시 다른 회교도들과 마찬가지로 한때 사라예보에 살았던 세르비아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를 단두대에 올려야 할 1급 전범으로 주저없이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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