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영예대신 “움막속의 상처”/난지도 비닐하우스서 “진통제없인 하루도 못견뎌”/유공자 ‘높은벽’… 후유증 괴질 수술 엄두도 못내혁명의 이름은 부활했으나 혁명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4·19가 「의거」에서 「혁명」으로 격상된지 2년이 됐으나 아직 많은 이들이 36년전 「그날의 상처」를 그대로 안은 채 음지에서 외로이 살아가고 있다.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는 온국민이 민주투사였으니까요』
60년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하던 상오 11시께. 서울 동대문경찰서 앞에서 시위대 맨 앞에서 『독재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던 최길주씨(59·경기 고양시 덕양구·당시 성동공고 3년)는 경찰이 쏜 실탄 8발을 맞았다.
그후 최씨가 살아온 30여년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성치않은 몸을 마다않고 시집온 박하란씨(54)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본 작은 기쁨도 생활고 속에서 퇴색됐다.
난지도 일대 농가들의 농막 옆에 5평 남짓한 비닐하우스 집을 짓고 새참 품을 팔아 근근히 끼니를 이었다.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부상으로 인한 통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진통제 없이는 하루도 견디기 힘들었다. 독한 약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최씨는 골반 양쪽 고관절이 녹아내리는 괴질까지 얻었다. 1,000여만원이 드는 인공관절수술을 받을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최씨가 4·19 직후 상이 신청을 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요시찰인물」로 찍힐 지 모른다는 친지들의 걱정 때문이었다. 문민정부 이후 94년에 다시 실시한 4·19혁명 부상자 국가유공자 신체검사에서 최씨는 「해당없음」 통고를 받았다. 상이군경과 동일하게 적용되는 국가유공자 기준의 벽이 너무 높았고 그나마 부상 때문에 얻은 후유증은 혁명으로 인한 신체장애로 인정되지 않았다.
제대로 걷지 못해 3급 장애인 판정을 받은 최씨에게 지난날의 「영예」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오른쪽 등에 남아있는 유탄 1개 뿐. 2남2녀의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혁명무용담」은 괴로움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최씨와 같이 4·19 혁명 당시 중상을 입은 것으로 대한적십자사에 등록된 부상자는 모두 1,743명. 이들중 국가유공자 예우를 받고 있는 사람은 244명에 불과하다.<김경화 기자>김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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