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부정” 무정부 민중혁명 외침/가슴속 사상을 소설·시에 그대로 농축/계몽서 깨어난 신채호「타협」 철저히 깨고 「투쟁」 선언뒤에/작품선 모든 제도를 “0” 으로 무화/옥사 의열단원 이육사물러설 수 없는 “하늘도 다한곳” 서/“강철로 된 무지개” 를 꿈으로 표현객:임이 침묵하던 시대, 상실감의 울림이 충만하던 시대, 이에 응전하는 문인들의 태도랄까 몸짓은 어떠했을까. 이런 물음은 조급함의 소산일지 모르나 자주 점검되어야 할 성질의 과제가 아닐까요. 어째서 문인들이 독립선언서를 쓰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또 유치장행도 불사하였는가. 또는 옥사하거나 어째서 절명시(매천)를 남기고 자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어째서 문인들이 붓을 꺾거나 친일행위에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주:요컨대 국권회복에 문학이 얼마나 기여했는가를 묻는 일. 일제강점기 문학이해의 한 중요 준거항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의 저항이랄까 응전의 도식이니까. 이 경우 매우 난처한 것이 이른바 근대성의 개념이 아닐까. 제국주의가 민족주의의 다른 명칭이기에, 이 응전도식은 민족주의 대 민족주의의 싸움에 해당됨이 아닐 수 없지요.
객:헤겔이 말하는 주인·노예의 변증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군요.
주:그렇소. 우리도 힘을 키워 독립하자는 이른바 준비론이 이 범주에 들 것입니다. 무슨 힘이며 그 힘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 서양(계몽적 이성)이 하는 그 힘과 꼭 같은 내용과 방식이라면 100년가야 불가능한 응전이 아니겠는가.
객:그렇다면 다른 응전방식도 있다는 뜻입니까.
주:동일한 인식체계(커뮤니케이션 코드) 내에서의 서열다툼을 두고, 주인·노예변증법이라 한다면, 이는 비트겐슈타인식으로 말해 독백범주이지 대화의 범주라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주체 내부에서 벌어지는 변증법이니까.
객:실력자 둘이서 죽음을 담보로 한 일대 일의 투쟁(상대방의 승인)을 벌이기, 그때 승자가 주인, 패자가 노예라는 도식 아닙니까. 죽음이 무서워 항복한 것이 노예이니까. 승자는 승리하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허무에 빠지는데, 자기를 승인해줄 타자가 사라졌으니까. 노예란 타자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니까. 이 순간 승자(주인)는 허무를 감당키 위해 향락에 빠질 수밖에. 노예를 가혹하게 다룰 수밖에. 그러나 놀랍게도 노예는 노동을 통해 스스로를 주인으로 이끌어 올린다는 것. 이 순간 주인·노예의 역전관계가 일어난다는 것.
주:그러니까 한 주체 속에서 벌어지는 내적 드라마의 도식 아니겠는가. 계몽적 이성이 서구의 것이라면,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후진국의 민족정신이란 아무리 발버둥쳐야 부처님 손바닥 속의 일. 진정한 응전이라 부르기 어렵지 않겠는가.
객:선생께서 일찍이 단재 신채호에 주목하여 여러 편의 글을 쓴 것이 기억되는데, 헤겔적 도식에 대한 응전방식의 모색에 관련된 것이었지요.
주:그렇소. 매일신보 논객이었던 단재는 철저한 민족주의자. 그는 역사를 「아(아)와 비아(비아)와의 투쟁」이라 규정했지요. 바로 이것이 계몽적 이성의 도식. 그가 이 사실을 알아챈 것은 중국에서 공부를 다시 한 후였지요.
객:동방무정부주의 단체에 나아간 것 말입니까. 이른바 아나키즘.
주:가장 강력한 권력(폭력)이 국민국가 아니겠는가. 국민국가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는 제국주의(일제)를 부정할 수 없는 법. 『나도 국민국가를 포기할 테니 너도 그래라』 최소한 이런 자리에 서야 앞뒤가 맞지요.
객:국민국가를 부정한다면 그 대안이란 무엇인가요. 국민국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감입니까.
주:국민국가(정부)와 전혀 무관한 자리의 설정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크로포트킨이 정립한 상호부조론(Mutual Aid)도 그 중의 하나.
객:생물학에서 도출한 그런 자연법칙이 과연 인간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더구나 무제한의 욕망분출을 전제한 자본재 생산양식단계에 이미 진입한 세계 아닙니까. 현실성은 없지만 이론상으로는 투명하다는 겁니까.
주:….
객:『나도 국민국가를 포기할 테니까 너도 그래라, 국가없이 서로 도우면서 살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권해도 상대방이 『나는 포기하기 싫다. 너도 그래라』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주:간단 명료하지요. 『너 죽고 나 죽자』로 나올 수밖에.
객:그 방법은? 조직(정부)을 부정한 이상 개개인의 전체에 대한 「너 죽고 나 죽기」이겠지요.
주:단재가 말하는 민중 직접봉기론이지요. 개개인이 직접 싸우는 방식. 개개인이 직접 폭탄을 들고 봉기하여 싸우기. 바쿠닌의 유명한 폭력론도 이 범주에 드는 것.
객:과연 승산있는 싸움이겠습니까. 달걀로 바위치기라고나 할까.
주:중요한 것은 응전방식(인식의 틀)이지 승산 따위에 있지 않습니다. 조금 도식적이긴 하나, 여기까지 이르면 다음처럼 말해볼 수도 있지요. (A)「민족주의, 제국주의, 자본주의」등을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있으며, 이들 사이의 투쟁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서로 「상대적인 적」으로 간주한 자리에 서 있는 범주.
객:그러니까 언제나 타협의 여지가 있다?
주:(B)「허무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등의 한 묶음의 사상계열도 있지 않겠는가. 이 역시 그들 상호간의 알력이 있다 해도 「상대적인 적」에 지나지 않는 범주.
객:「너 죽고 나 죽기」, 곧 「절대적인 적」으로 맞서는 경우란 (A)와 (B)사이에서 성립되는 것이겠군요.
주:너무 거칠다는 비판이 물론 있을 수 있지만, 설명모델의 하나로 볼 수 없겠는가. 특히 아나키즘의 경우에 주목할 것입니다.
객:선생은 지금 단재의 저 유명한 「조선혁명선언」(1923)을 염두에 두고 있군요. 아나키스트 단체인 의렬단의 요청으로 다물단에 가담한 단재의 글 아닙니까. 외교론과 준비론 따위를 「미망」이라 하여 철저히 부정한 것이니까.
주:「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일본과 타협하려는 자(내정독립, 자치, 참정권론자)나 강도정치 하에서 기생하려는 주의를 가진 자(문화운동자)나 다 우리의 적임을 선언하노라」. 두 가지 점이 분명하지요. 강도일본을 「절대적인 적」의 자리에서 바라보기가 그 하나. 이와 타협하려는 어떤 노선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 다른 하나.
객:그렇다면 어떤 방법론이 있는가. 「혁명」뿐이라는 것. 어떤 방식으로 혁명(절대적인 적과의 싸움)에 착수해야 하는가.
주:민중 직접봉기(폭력)가 그것. 민중이 곧 민중 자기를 위하여 하는 혁명인고로 「민중혁명」, 또는 「직접혁명」이라 칭하는 것.
객:폭력이 이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겠군요.
주:선언문에 분명히 그렇게 나와 있지요. 뿐만 아니라 폭력(암살, 파괴, 폭동)의 목적물이 다음처럼 제시됩니다. 1.조선총독 및 각 관공리 2.일본천황 및 각 관공리 3.정탐노, 매국노 4.적의 일체 시설물.
객:어떤 중심점 있는 조직도 거부하고, 오직 민중 개개인의 직접 봉기만이 그 방법론이라면 치밀한 조직력을 갖춘 근대 국민국가(제국주의)와의 싸움에서 승산을 기할 수 없음은 불문가지. 이른바 게릴라전략이라고나 할까.
주:당초 승패를 초월한 곳에서 출발된 사상이니까 너무나 당연하지요. 「모든 압박에 졸리어 살려니 살 수 없고 죽으려 하여도 죽을 바를 모르는 판」(조선혁명선언)에서 나온 사상이니까. 절대적 경지이지요. 이 경지가 시적 의상을 입고 나온 것이 바로 이런 작품이지요.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객: 륙사 이원녹의 「절정」전문 아닙니까. 그가 의열단원이었다는 것, 북경에서 옥사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지만, 「절정」이 아나키즘의 시적 표현이라는 선생의 지적은 신선하군요. 「하늘도 다한 곳」, 한 발 물러설 곳도 없는 경지, 「강철로 된 무지개」(황홀경).
주:「하늘도 다한 곳」에 거듭 주목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득한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이를 전면 부정하고 있으니까.
객:그 순간 헤겔주의란 무용지물로 변했다?!
주:….
객:이 장면을 두고 우리 사상사의 한 장관일 뿐 아니라, 문학사의 한 장관이라 부른다면 조금 과장일까.
주:거기까지는 모르겠으나, 사상사와 문학사가 나란히 가고 있었다는 점만은 동의할 수 있습니다. 단재 자신만 보아서도 그렇지요. 역사소설 「을지문덕」(1908)을 쓴 단재이지만 이 애국계몽주의계 소설에서 벗어난 다음 두 소설은 사상사와 문학사의 행복한 동행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장관이라 할 만하지요.
객:「꿈하늘」(1916)과 「용과 용의 대격전」(1928) 말이겠군요.
주:맞습니다. 후자가 특히 그러합니다. 계몽적 이성으로 표방되는 서양의 용(드래곤)과 대적하는 또 다른 용(미리)의 대결이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드래곤이란 영(제로)이었던 것.
「천국이 전멸되기 전에는 드래곤의 정체가 오직 「0」으로 표현될 뿐이다. 그러나 드래곤의 「0」은 수학상의 「0」과는 다르다. 수학상의 「0」에는 「0」을 가하면 「0」이 될 뿐이지만 드래곤의 「0」은 1도, 2도, 3도, 4도, 내지 십, 백, 천, 만등 모든 숫자로 될 수 있다. 숫자상의 「0」은 자리만 있고 실물은 없지만 드래곤의 「0」은 총도, 칼도, 불도, 벽락도 기타 모든 「테러」가 될 수 있다. 금일에는 드래곤이 「0」으로 표현되지만, 명일에는 드래곤의 대상의 적이 「0」으로 소멸되어 제국도 「0」, 천국도 「0」, 자본가도 「0」, 기타 모든 지배세력이 「0」으로 될 것이다. 모든 지배세력이 「0」으로 되는 때에는 드래곤의 정체적 건설이 우리의 눈에 보일 것이다」
객:영개념의 설정이야말로 근대 자체를 무화시키는 방법이었군요.
주:한 가지 설명모델일 뿐. 카프문학이라 부르는 또 다른 드래곤스런 모습이 지평선에서 떠오르고 있었으니까.<문학평론가·서울대교수>문학평론가·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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