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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엔 두개의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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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엔 두개의 4·19”

입력
1996.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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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36돌… 환희·고난의 증인 김긴태씨/60년 시위중 총상 3차례 수술/63년 기념일엔 “군정반대” 할복 /87년까지 감시눈길… “그날의 의미 퇴색 안타까워”「4·19」36주년을 맞는 김긴태씨(57·김긴태·서울 강서구 가양동 가양아파트 A동209호)의 가슴에는 두개의 「4·19」가 존재한다.

60년4월19일이 자유민주주의를 되찾은 환희의 날이라면, 그로부터 3년후인 63년 4월19일은 군사정권에 항거하다 꺾인 고난의 「4·19」이다.

김씨는 「4·19」당시 고려대 2학년생이었다. 이날 동대문 경찰서 앞에서 시위하다 총상을 입고 3개월간 입원하며 수술을 3번이나 받았다. 김씨는 퇴원후 전국을 돌며 농촌계몽 활동을 펴고 20여개 이상 난립했던 4·19 관련단체를 4월혁명단으로 통합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보람의 날들은 이듬해 5월 군부의 총칼로 끝이 났다.

김씨는 그래도 민정이양 약속을 믿었으나 박정희국가재건최고위원회의장이 군정 연장을 선언하면서 「4·19」 3주년 기념식때 「4·19」 부상자들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한다고 발표하자 의분에 휩싸였다.

『4·19의거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김씨는 63년 4월19일 하오1시 포상식이 열리는 서울운동장 야외행사장에 참석했다. 검은 선글라스를 낀 박의장이 자신의 앞줄에 선 동지들에게 포장을 수여하는 순간 『군사독재 결사반대』를 외치며 준비해간 칼로 자신의 복부를 힘껏 찌르고 끌려 나갔다.

김씨의 항거는 계속됐다. 그는 그해 5월 박의장 저격계획을 세웠다가 체포돼 5명의 동료들과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민정이양이 결정된 65년 석방됐다.

이후 87년까지 김씨 주변에는 정보기관의 감시와 회유가 그치지 않았다. 한달에 한번씩 형사가 들이닥쳐 집주인에게 쫓겨난 적도 많고 직장도 전전해야 했다. 유신이 선포된 72년에는 『공화당에 입당하면 평생 편하게 해주겠다』는 유혹도 받았으나 단호히 거절했다. 김씨는 기자재 수입사업을 하다 동업자에게 사기당한 후 부인, 2남과 함께 작은 아파트에서 살아가고 있다.

『요즘 젊은 세대들 사이에 4·19의 의미가 퇴색해 안타깝습니다. 불의에 항거했던 선배들의 희생 위에 오늘의 번영이 가능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라고 김씨는 말했다.<조철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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