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은 우리 민족의 과제다. 남북으로 나뉜 민족 사회의 두 덩어리를 하나의 민주 민족 공동체로 만들자는 것이 통일이다. 따라서 통일의 주체는 남북한에 갈라져 살고 있는 민족 성원 전부다. 이 문제를 논의해야 할 당사자는 우리 국민들의 대표여야하고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남북한 정부 당국자가 두 당사자다.통일 논의에 앞서 합의해야 할 일은 남북한 당국간에 서로를 협의당사자로 존중한다는 것과 전쟁하지 말기로 뜻을 모은 후 이 뜻을 다짐하는 「계약의 체결」이다. 누가 합의보아야 하는가? 당연히 총을 들고 휴전선에서 맞서 있는 군대를 통수하는 남북한 정부다.
이렇게 자명한 남북 당사자 협의 원칙을 북한은 지금까지 거부해 왔다. 대신 내놓은 제안이 북한 정부와 미국간의 「잠정평화협정」이었고 이를 강요하기 위해 북한은 그들이 「기본 합의서」에서 약속한 정전협정 준수도 무시하고 북측 비무장 지대에 무장 병력을 투입하고 있다.
북한의 억지에 대한 대답이 어제 제주도에서 한미 정상의 공동 발표로 제시된 「4자회담」이다.
이 성명 내용은 사실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 남과 북이 주당사자가 되고 미국과 중국이 합의의 보장자가 된다는 종전의 이른바 「2+2」회담을 조금 손질하여 처음부터 네 나라 대표가 한 자리에 모이자는 것으로 고친 것이다. 다만 발표 형식이 한미 두 대통령의 공동 발표여서 제의에 무게를 실어 주었다는 점이 특색이다.
그 동안 북한은 미국과의 2자회담을 성사시켜 한국을 「미국의 종속적인 존재」로 부각시키려 애썼고 한국은 남북 합의를 미국과 북한간의 관계 개선의 전제 조건으로 묶어 놓음으로써 북한이 남북 협상에 응하도록 압력을 가해 왔었다. 이런 정치 심리전적인 명분 싸움은 남북한 관계처럼 정치적 대결 관계에서는 그 상징성 때문에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 된다. 그래서 남북 모두가 서로 자기 주장을 고집해 왔고 이에 따라 그 동안 한반도 문제는 제자리걸음을 해왔다.
이번 제안은 하나의 타협안인 셈이다. 남북한의 안을 합쳐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아마도 이를 거부하거나 내용을 아전인수식으로 고쳐 해석해서 「변형된 북·미회담」으로 이끌어 나가려 할 것이다.
한국은 사실상 기존 입장에서 한 발 물러난 셈이다. 남북 당사자 원칙의 부분 수정이기 때문이다. 북한을 달래보겠다는 생각이 있어 양보를 한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한미간에 조성되어 오던 긴장을 풀 수 있는 「교통정리」의 의미이다. 남북한 긴장 완화와 평화 협정 체결 문제에서는 한국과 북한이 주당사자가 되어야 하나 그 밖의 문제에서는 미국이 북한과 「2자회담」을 해도 무방하다고 사안별로 내용을 분리해서 한미 마찰을 줄여 보자는 속마음이 깔려 있다고 보면 된다.
미국은 벌써부터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해 오고 있다. 다만 우방인 한국이 남북한 협의 진전을 선행 조건으로 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에 뜻대로 진전 못 시켰었다. 이번의 교통 정리로 한국이 이 요구를 거두어 들였으므로 미국은 홀가분해졌을 것이다. 또한 한국은 미국의 대북 관계 개선 저지라는 큰 외교적 부담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에서 한결 자유스러운 대북 정책을 펼 수 있게 되었다.
정책이란 목표와 현실을 조화시켜 나가는 기술이다. 이번 4자회담 제의는 목표도 살리고 현실도 수용했다는 점에서 우리 정부의 성숙된 정책 추진 자세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제의는 당장 성사될 내용들은 아니다. 북한이 받아 주면 좋고 안 받아주면 수락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그런 제안이다. 우리의 정책의지 천명의 의의만으로도 우선 만족할 만하다. 다만 이제부터 다음 수를 침착하게 생각해 두어야 한다.
첫째, 우리의 대북한 정책의 출발은 북한의 전쟁 위협 제거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우리는 충분한 억제력을 갖추는데 주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한미간의 구체적 협력 체제를 굳혀 가야 한다.
둘째로 북한이 이 제의를 변형하여 수용하려 할 때 쐐기를 박을 조치를 마련해 두어야 한다. 누구든지 4자회담을 남북 당사자 원칙을 깨는 방향으로 고치려 할 때는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셋째로 북한과 어떤 협의를 시작하든 「합의 사항 존중 의사」를 미리 다짐해야 한다. 이미 북한은 우리와 「기본합의서」에서 정전 협정 준수를 약속했는데도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북한이 이러한 태도를 고치지 않는 한 어떤 회담도 의미가 없다.
이번의 4자회담 제의로 우리가 새로 얻어낸 것은 없다. 다만 무리하게 엮어 놓았던 남북 관계, 미북한 관계 및 한미 관계를 현실적으로 갈라 놓았다는데 제일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제의를 계기로 한국은 미국의 도움 없이 독자적 대북한 정책을 세워 나갈 책임을 지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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