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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이츠­타고르­유종열 그문학적사회적영향(김윤식의신문학사탐구: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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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이츠­타고르­유종열 그문학적사회적영향(김윤식의신문학사탐구:7)

입력
1996.04.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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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문학 「양」삼아 신문학은 「사자」로/소월은 예이츠의 「꿈」대신 「진달래」 뿌려놓고/만해는 타고르에 “무덤에 황금치지말라 ”비판/가해자인 일 유종열의 동정심엔 위안느껴/국권 상실감 투명한 예술로 기운차려객:우리 신문학이 외래사상과 문학의 영향 아래서 형성되어 왔다는 것도 자주 점검되어야 하겠지요. 계몽주의단계에선 특히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주:「사자가 강한 것은 양을 잡아 먹었기 때문」. 이 말을 비교문학자 카레는 귀야르의 책 서문에다 적어 놓았더군요. 영향관계를 은밀한 것과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나눌 수 있다면 전자를 문학적인 영향관계라 볼 것입니다.

객:소월의 저 유명한 「진달래꽃」을 문학적 영향관계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논의도 있는 모양인데요.

주:이 작품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의 모양부터 볼까요.

객:시집 「진달래꽃」(1925)에 실린 것인데, 오늘날 우리가 대하는 「진달래꽃」과는 조금 다르군요. 시집을 낼 때 시인 자신이 손질한 모양이지요.

주:아마 그럴 것입니다. 문제는 이 작품의 시적 핵이라 할 대목이 꽃을 뿌려 놓겠으니 그 꽃을 밟고 가라는 곳에 있지 않겠습니까. 있는 것이라곤 지천으로 피는 진달래꽃뿐, 그것밖에 가진 것 없는 마음 가난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임을 향한 최상의 마음씀씀이란 무엇이겠는가. 이 길밖에 또 있겠는가. 영변 근처에 산 사람이라면 이 길밖에 없지요.

객:영변 아닌 다른 곳, 가령 시베리아나 프랑스나 미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꼭 같은 감정을 다른 사물을 통해 표현했을 것이다?

주:맞습니다. 아일랜드시인 예이츠(1865∼1939)는 이렇게 표현했것다. 「금빛 은빛으로 짜서/수놓은 천상의 비단/밤과 백광과 박명의/푸르고 구물고 검은 비단이 있다면/그것을 당신 발밑에 깔아드리오리다/그러나 가난하여 내 꿈을 깔았오이다/내 꿈 밟으시는 것이오니 사뿐히 밟으소서」―이양하역(「대학신문」 403호)

객:진달래꽃 대신 꿈을 깔았군요. 만인 공통의 정서거나 감정이기에 영향관계 운운할 처지가 못되는 것이군요.

주:이 정서 자체만을 문제삼을 땐 그렇다고 보아야지요. 사랑이나 향수, 육친애, 조국애등 이른바 진, 선, 미란 그 자체가 인류 공유의 것이니까.

객: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주:독서환경이랄까, 주변의 분위기에 주로 의존된다고 볼 수 없을까요. 가령 소월의 스승 김억의 「오뇌의 무도」에 실린 예이츠 시의 번역을 들 수 있지요.

객:소월이 예이츠의 이 작품을 읽었다고 볼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알게 모르게 이런 발상의 촉발이 있었다고 볼 수 없겠는가.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그러나 독서환경상 가능성은 배제하기 어렵다….

주:문제는 사자의 그 위대한 힘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쪽이 더 큰 문학적인 빛과 향기를 뿜어내느냐에 수렴되는 것이 아닐까요.

객:사회적 영향, 그러니까 선생식으로 말해 사회적 환경론이 되겠는데, 가령 R 타고르(1861∼1941)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주:임이 침묵하던 시대, 타고르의 이름은 가히 시적이었다고 할 수 없을까.

다음 시구를 모르는 조선지식인은 별로 없었다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일찌기 아시아의 황금기에/빛나던 등촉의 하나인 조선/그 등불 한 번 다시 켜지는 날에/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조선에 부탁」1929. 3.28)

객:동아일보(1929.4.2)에 실린 그 시군요.

주:이 시를 얻어낸 기자의 주석에 따르면 도쿄에 머무르던 타고르가 캐나다를 향해 떠날 때 조선방문을 요청하자 거절하면서 이 간단한 의미의 몇 자 시를 써주며 『동아일보를 통하여 조선민족에게 전달해 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객:「기탄잘리」(1912), 「생의 실험」등으로 아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된 타고르는 영국식민지인 그의 조국 벵골의 영광일뿐 아니라 아시아의 영광으로 인식되었던 그런 인물 아닙니까. 동방의 등촉의 하나인 조선에 대한 그의 애정과 평가와 염원이 이 시에 잘 드러난 것 같습니다. 짧기도 하지만 참으로 요령을 얻은 투명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주:고난에 찬 사람이나 민족에겐 스스로 기운나게 하는 그 무엇이 필요한 법. 세네카에 따르면 고대로마인에게 그것은 극기였고 이것이 그들 자존심의 근거였던 것. 한편 기독교인들에겐 여호와신이 있었지요. 그런 좋은 극기도 신도 가진 바 없는 우리 민족에게 스스로 힘내게 하는 방식은 무엇이었을까. 고려청자, 한글, 석굴암, 인쇄술이 있지 않았던가. 베토벤도 없었고, 300년 묵은 잔디밭도 없었고, 증기기관차도 없었지만, 문제는 있었던 것에 매달리기였던 것. 스스로 기운내기의 방법론이었지요. 「조선에 부탁」은 이런 문맥에 직결되었던 것이기에 시적 현실이 막바로 사회적 현실일 수 있었지요.

객:타고르에 대한 여러 비판도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주:타고르는 벵골의 명문출신. 서구식 교육(영국유학)을 받은 행운아. 벵골어로 쓴 「기탄잘리」(드리는 노래)를 직접 빅토리아조 고체의 산문으로 번역했던 것. 이 작품에 노벨상이 주어지자 내외에서 비판이 있었지요. 2류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코스모폴리타니즘스런 경향 때문에 네루의 민족주의노선과도 어긋났다는 것, 영국으로부터 작위(경, Sir)까지 받았다는 것(훗날 반납함)등등.

객:….

주:「기탄잘리」의 서문을 쓴 예이츠는 서구의 깊은 전통인 묵시록의 강렬한 사구와 그 양식을 같이한다고 지적했고, 또 어떤 비평가는 너무나 영국적이라고 보았지요. 벵골이 타고르를 서구쪽에 준 것이 아니라 서구가 그를 벵골에 준 것이라는 역설이 나돌 정도였지요.

객:타고르를 찬양함으로써 서양은 자기들의 재능을 찬양한 꼴이군요. 그야 어쨌든 그 쪽 사정일 테고, 우리쪽 사정은 다르지 않겠습니까.

주:타고르는 일본을 세 번, 중국을 두 차례 방문했지요. 주로 강연을 했고,미국도 방문했지요(여행목적이 돈벌이에 있었다는 비난도 있었으나). 일본에서 그를 환영한 측은 종교학자들이고 민중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고 유명한 논객 다케우치 요시미(죽내호)가 지적하고 있습니다. 약소민족시인의 헛소리 정도로 본 것이지요.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달랐지요. 민중측이 호응했지요. 유력한 문예지가 다투어 특집호를 낸 사실에서도 이 점이 엿보입니다. 비록 연약해 보이는 타고르의 작품이나 밑바닥에 깔린 노여움을 그들이 간파한 까닭. 방일때마다 그는 여러 모임에 나가 연설을 했지요. 첫 방일(1916)에서 그는 일본인의 도덕성을 비판했고, 제2차 방일(1924)에서 일본인의 도덕적 위험을 조선문제와 관련해 제기했지요.

객:….

주:우리측 타고르의 수용물결은 (1)진학문의 「타선생 송영기」(「청춘」제11호, 1916). 방한을 권하자 그는 대신 「쫓긴 이의 노래」(The Song of the Defeated)를 써주었던 것. (2)김억에 의한 「기탄잘리」(1923), 신월(1924), 원정(1942)등의 시집번역. (3)「조선에 부탁」.

객:만해 한용운의 타고르비판이 있는 줄 아는데요.

주:「타고르의 시 '원정`을 읽고」가 그것. 그 한 대목. 「벗이여 나의 벗이여/죽음의 향기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백골의 입술에 입맞출 수는 없습니다./그의 무덤을 황금의 노래로 그물치지마셔요./무덤 위에 피묻은 기대를 세우셔요」.

객:피묻은 깃대, 과연 만해다운 울림이군요.

주:문학의 사회적 울림의 일환으로 좀 더 폭이 큰 것으로 일본 시라카바(백화)파의 한 사상가도 외면할 수 없지요.

객:「조선과 그 예술」(1922)의 저자 야나기 무네요시(유종열·1889∼1961) 말입니까. 우리 정부에서 보관문화훈장(1984)을 추서한 그 학자 말이겠군요.

주:맞소. 야나기가 쓴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개조」 1922.9)가 그것. 이를 동아일보(1929.8.24∼28)가 재빨리 실었지요. 광화문을 헐지 말라는 호소문이었지요. 「정치는 예술에 대하여 어디까지나 몰염치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라든가 「우방을 위해 예술과 역사와 도시를 위해 더구나 그중 민족을 위해 경복궁을 구원하라」고 그는 썼지요. 「조선에 부탁」에 버금가는 시적 현실이었던 것. 「석굴암의 불상(…) 오직 새벽빛으로 비추어 보는 그녀의 횡안은 실로 지금도 나의 호흡을 빼앗는다」고 그는 썼지요. 동아일보기자 염상섭은 야나기의 「조선인을 상함」(동아일보 1920.4.12∼18)을 번역했고, 동아일보사는 사업 제1호로 그의 부인 야나기 겐코(유겸자)의 독창회(1920.5.4)를 열었지요. 그들 일행의 행사와 그것이 장안에 어떤 화제거리를 제공했는가는 그녀를 수행해온 「폐허」파의 작가 남궁벽을 모델로 한 민태원의 소설 「음악회」(「폐허」 2호)에 상세합니다. 사회적 사건이었음이 드러납니다.

객:가해자측에 선 사상가의 말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결국 동정심수준 이상일 수 있을까. 병주고 약주는 꼴이라는 지적도 있을 법 한데….

주:문제는 그 이전에 있지 않았겠는가. 3·1운동 직후 우리 민족이 스스로 기운나게 하는 방식의 발견이 무엇보다 앞섰지 않았을까. 스스로 기운나게 하는 방식을 오직 예술에서만 찾아낼 수 있었던 것. 비록 과거형이나, 그러한 예술을 가진 민족이기에 결국 멸망할 수 없다는 것. 자존심의 근거로 이보다 투명한 것이 달리 있었던가. 그렇게 생각했던 한 시기가 있었다는 것.<문학평론가·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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