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에 양치며 나무심는 노인 통해/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촉촉한 감동”아주 특이하고 과격한 것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하고 개성이 강하면서도 이 세상에 대해서 반항적이고 그리고 남자든 여자이든 매력이 있다. 어쩌면 누구나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긴 소설을 읽는다거나 하는 일은 싫은 일이다. 직장에서건 나이트클럽에서건 튀고 싶다. 마치 달리는 오토바이처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오늘은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다,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을 만난 것도 그런 때였다. 나는 그것을 1년 간격으로 두번 읽게 되었다. 두번째 읽었을 때는 비디오를 구해서 보았다. 주인공은 1차대전이 있기 전의 프랑스의 황무지를 여행하다가 말없이 양을 키우면서 황무지에 나무를 심고 살고 있는 노인을 알게 된다. 황무지는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처럼 황폐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쓸쓸한 곳이었다. 이 소설은 아주 짧고 그리고 그다지 복잡한 스토리가 아니기 때문에 내용을 다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런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글의 처음에서 말한 것처럼 고요한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에 이 글을 읽었다. 이전에 이런 글을 좋아한다고 누가 말하면 나는 촌스럽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80년대나 그 이전을 그리워하는 노인네처럼 생각된다는 선입견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피곤해서 집에 바로 돌아와 구두를 벗고 쉬고 싶은 날이 있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단순하고 고요한 스토리 안에 현란한 개성을 뛰어넘는 촉촉함이 있었다. 내가 그것을 즐기게 된 것은 비디오테이프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비디오테이프는 어린아이들이나 청소년을 의식해 만들어 놓은 것 같았지만, 내 생각에는 어린아이들이나 청소년이 초록빛과 황무지, 그리고 바람부는 그림으로 가득한 그것을 별로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생각할 때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지친 어른들이 보기에 더 적당하다고 느껴진다. 어른들은 개성있고 매력적이 되기 위해서 아주 노력하고 있고 그리고 그만큼 지쳐 있기 때문이다. 아주 샤프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면서도 홀로 집으로 돌아가서는 남몰래 자신의 황무지에 「나무를 심는 사람」이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절대로 도시를 떠나지 못하면서도 황무지에 홀로 살아가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삶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장 지오노의 이 소설을 에코토피아 스타일의 녹색운동권 소설로 생각하거나 쓰레기 분리수거를 해야지, 하면서 읽는 것보다는 「나는 엄마가 필요해」 하는 마음으로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그리고 나무를 심는 사람이 꼭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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