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투가 다가온다. MBC 파업몸살이 춘투의 예신을 전하고 있는 터여서 긴장감은 한층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노총도 이미 작년말 임금협상 탈피를 선언하였고 제2노총 건설을 표방하는 민노총도 태세를 바짝 가다듬고 있는 모양이다. 최근의 파업은 언론사 최고경영자의 능력시비를 둘러싸고 촉발된 것이지만, 이전에는 임금인상이 노사갈등의 주요한 원천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이제 임금인상률 시비가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사실 임금인상률을 둘러싼 그 간의 크고 작은 분규의 배경에는 「노사관계의 본질적 개혁」이라는 더 중요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더욱이 올해는 전직대통령의 비자금사건이 불거져 나온 터라 사회경제적 쟁점이 노사협상 테이블에 오를 가능성이 어느 해보다도 크다. 노조의 숙원사업인 정치조직화 및 경영참여와 90년대 초반이후 성공적으로 추진된 경영혁신전략의 부작용을 둘러싼 시비가 그것이다. 한국 정도의 경제대국 중 정치·경제정책의 결정과정에서 노조의 참여가 우리만큼 차단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 간의 기업혁신도 경영자 주도로 진행된 것이어서 성공의 양만큼 노조의 불만도 누적되었다. 올해 예상되는 노사분규는, 말하자면 「성공의 위기」에 속한다.○경영혁신의 득실
과거 몇 년 동안 한국의 대기업은 상황변화에 신속히 대처하는 탁월한 대응력을 발휘하였다. 그리하여 87년의 노사위기와 80년대말의 경제위기를 성장의 계기로 전환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선진국의 예에서 증명되듯 경제성장에는 고도의 세련된 경영능력이 필요하다. 87년 대분규 당시 외국언론과 전문가들은 한국의 고도성장이 끝장났다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그 비관적 진단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한국의 대기업들은 고속행진을 지속하였던 것이다. 세계의 유수기업들이 머뭇거리는 틈을 타 자동차와 반도체분야에서 일구어낸 공적도 기업주와 경영진의 결단력과 추진력 덕택이다. 경영혁신전략의 성공으로 대기업은 87년부터 시작된 노조에 대한 수세국면을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생산성과 효율성이 과도하게 강조되는 동안 산업민주화의 소중한 계기가 유실되고 있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노사관계는 임금과 복지공세로만 해결되지 않는다. 한국의 대기업이 택한 「노조회피전략」과 「비용증대전략」은 노사동반자관계를 바탕으로 한 선진국형 「생산성연합」을 창출해야 하는 장기적 과제에 비하면 단지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 독일이 막대한 통일비용을 지불하고도 여전히 경제력을 신장시키고 있는 이유는 서독노동자들이 100마르크 정도에 달하는 임금을 동독노동자들을 위하여 반납했기 때문이다. 노조 주도의 임금자제가 이루어진 것이다. 산업민주화의 경험이 전무한 미국이라면 이런 일을 상상할 수 없다. 산업민주화란 상호신뢰를 전제로 한다. 빈곤했던 시절인 50년대에 독일은 이미 사회적 시장경제이념을 바탕으로 산업민주화의 초석을 닦았다. 금세기의 역사적 경험에 의하면 분배제도의 개선과 노조참여의 기회확대를 꾀하지 않고 선진국으로 진입한 국가는 미국과 일본 뿐이다. 그래서 미국과 일본은 이제 국제경쟁력의 쇠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거나 성장패턴 자체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직면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 노사관계의 합리화노력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지만 성장우선주의와 반노동주의의 오랜 폐습 때문에 노동배제의 일방적 행진은 수정되지 않았다. 더욱이 노사문제는 개혁정치에서 가장 소외된 영역이 아닌가? 경영혁신에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산업민주화를 향한 소중한 계기는 유실된 것처럼 보인다.
○참여와 개방으로
미국경제학자인 크룩만은 한국의 경제성장이 결코 「기적」이 아님을 강조한다. 한국의 성장은 제도혁신의 결과가 아니라 투입량의 단순한 환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의 성장을 과대포장해온 학자들의 성급한 평가를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는 그의 고백을 감안하더라도 크룩만이 한국경제의 아픈 곳을 건드렸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다. 경영혁신은 생산성 향상의 중요한 축인 노사관계의 합리화작업을 동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정성장은 불가능하다. 가능하다 하더라도 민주적 가치와는 거리가 멀다. 한국은 인적 자본보다 물적 자본을 중시해온 「천박한」 국가 중의 하나이므로 「아시아의 다음 거인」이 제발 흉칙한 얼굴로 등장하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다. 인적 자본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은 산업민주화와 복지사회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와 노동문제를 일방적으로 관리하는 「분단과 차단」정책으로부터 「참여와 개방」기조로 전환해야 한다. 언젠가 느닷없이 찾아올 경기침체와 사회적 위기의 격랑에 대비하는 이 시대의 지혜이다.<서울대교수·사회학>서울대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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