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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와 베를렌의 작시법(김윤식의 신문학사 탐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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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와 베를렌의 작시법(김윤식의 신문학사 탐구:5)

입력
1996.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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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사상 벗어나 「참예술」 열망 분출/“김억의 「오뇌의 무도」는 우리 근대시의 전문화와 탈계몽주의 원동력이죠”/순수 관능과 정서 통한 신천지 개척의 몸부림객:문학(예술)이 사회문제와 같이 연관되어 진행되면서도 그 나름의 독자성을 갖춘다는 것, 다시 말해 사회사와 문학사의 갈림길이랄까 접점이라 할 수 있는 그런 장면이 떠오른 때는 언제쯤이었을까. 이제 그런 것이 궁금해질 단계에 이른 것 같은데요.

주:문학이 사회개혁의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하던 단계에서는 문학사와 사회사가 나란히 간다고 볼 수 있겠지요. 문학의 직접성이라고나 할까. 이를 제1차 계몽주의 단계라 부를 것입니다.

객:육당 춘원으로 대표되는, 국권상실 이전에 철든 문인들이 우선 그 범주에 들지 않을까. 김동인 염상섭 등으로 대표되는, 국권상실 이후에 철든 문인들이 제2차 계몽주의단계. 그들은 「참예술」을 하겠다고 외쳤으니까.

주:김동인 중심의 「창조」(1919), 염상섭 중심의 「폐허」(1920)등 동인지의 간행과 그를 둘러싼 문학행위가 문학사와 사회사가 분리되는 제1차 장면이라 할 것입니다.

객:그렇다면, 제2차, 3차 장면도 있다는 것이겠군요.

주: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가짐으로써 문학사 특유의 체계랄까 내면화를 시도하고자 해도, 그 쪽으로 너무 깊이 빠져 버리면 문학의 화석화랄까 퇴폐화가 초래되기 십상이지요. 이를 순문학의 위기라 부를 것입니다. 이 위기가 감지되면 문학 활성화가 요망되는 것이며, 이때 문학은 다시 사회문제의 표층으로 분출, 직접적인 작용을 하게 될 터입니다. 1920년대 중반 카프문학이 화산처럼 분출해 올라온 것이 이를 잘 말해주는 것.

객:선생께선 지금 문학사와 사회사의 변증법적 질서관을 지적하는 것 같은데….

주:….

객:그것이 문학사의 어떤 보편적 법칙성입니까, 아니면 한국 근대문학의 특수성입니까.

주:조금 경솔한 대답으로 들릴지 모르나 양쪽 모두라고 생각합니다. 이 과제는 우리의 대담이 끝날 무렵에 점검해 볼 성질의 것이 아닐까.

객:평양(서도) 중심의 동인지가 「창조」이고, 서울(경기) 중심의 그것이 「폐허」라 하지 않습니까.

주:맞습니다. 이 경우 주목해야 할 것은 「동인지」의 성격이지요. 어떤 목적을 가진 신문이나 잡지가 아니라 문학만을 겨냥한 점에 주목할 것입니다. 이 순간 문학의 독자성이 만천하에 천명된 것이니까. 이 자세야말로 문사의 자존심이자 「문학」의 독자성의 근거였던 것. 이를테면 「창조」파는 동아일보가 창간(1920.4)되었을 때 「창조」의 이름으로 축하를 합니다. 마치 어른이 어린이의 장래를 축복하는 듯한 사랑과 귀여움이 가득 든 그런 문장(「창조」6호 후기)으로.

객:두루뭉수리식 계몽단계에서 전문화·세분화하기로 나아가는 변화가 동인지의 출현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라면, 그것이 창출해낸 문학 전문성의 구체적 사례를 들 수도 있겠네요. 요컨대 「해에게서 소년에게」와는 선을 그을 만한 단계라고나 할까.

주:제 개인적 경험 한 가지를 먼저 말해보면 안될까요. 아직 대학원에 적을 두고 자료를 뒤지던 60년대초, 말로만 듣던 「폐허」 창간호에 마주쳤지요. 고려대 도서관이었습니다. 순간 가슴 설레지 않았겠는가. 왜냐고요? 표지의 그 기괴함이랄까 장엄함이랄까.

객:….

주:잠깐 보십시오. 대체 저 알파벳으로 된 시는 무엇이며 어느 나라 문자인가.

벌써 가을은 숨쉬어라,

스스로의 잔인한 차거움으로.

태양은 슬프게 흐릿이 쏘아보며,

비오는 하늘이 울고…

그리하여 언제나 무섭게

회색 빛 구름마저 달려들어라.

슬픈 생각에 나는 벌써 피곤하며,

의혹이 영혼에 스며오고…

(곽종훈씨의 번역)

저는 이것이 라틴어로 된 시가 아닐까 여겼지요. 그러나 다음 순간 고교시절 독일어선생께서 하신 말씀 한 대목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지 않았겠는가. 남성명사, 여성명사, 중성명사 등 복잡한 구조를 가진 독일어의 까다로움을 배워야 하는 우리들에게 독일어선생 왈, 이런 구별없는 말도 있다. 명사에는 무조건 뒤에다 O를 붙이는 에스페란토가 있다는 것. 가령 HUND(개)라는 단어에 O자를 붙여 HUNDO라 하면 된다는 것. 동사에는 무조건 S자를 붙인다는 것.

객:아, 알겠다. LA RUINO니까 LA는 관사일 테고, RUINO는 무슨 명사일 것이다. 아마도 Ruin(붕괴, 몰락, 폐허)이라는 라틴어계의 명사형이렷다?

주:맞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에스페란토를 공부하기 시작했지요. 제가 입수한 회월 박영희의 장서 속에는 에스페란토서적이 상당수 있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라 에스페란토가 우리 근대문학에 큰 몫을 했음이 드러나지 않겠는가. 6.25 이전엔 제2외국어로 대학에서 가르쳤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지요. 특히 홍형의 교수(대구대)의 활동이 뚜렷하더군요. 홍교수께 위의 시를 문의하자 작고한 뒤여서, 그 제자 곽종훈씨가 회신을 보내왔더군요.

객:언젠가 선생께서 우리 근대사상사 속에 세 가지 깃발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에스페란토 깃발입니까?

주:그렇소. 공산주의 깃발이 적기, 아나키스트 깃발이 흑기였고, 에스페란토의 그것은 녹기였지요. 당시의 잡지표지도 에스페란토로 적은 것이 많지요. KAPF (Korea Artista Proletaria Federatio)도 그러한 것 중의 하나. 요컨대 제국주의시대, 약소민족 또는 집단이 기댄 국제주의운동의 하나라고나 할까.

객:폴란드인 안과의사 자멘호프(1859∼1917)가 창안한 한갓 인공어에 지나지 않는 에스페란토가 어째서 그런 세력권을 형성했을까요.

주:전문가가 아니라 잘 알지 못하나, 인공어 자체는 데카르트, 훔볼트등도 염두에 두었던 인류의 한 가지 꿈이 아니었을까. 강대국이야 자국어로 세계제패가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관념상 에스페란토만큼 매력적인 것이 드물지요. 그러기에 에스페란토(Esperanto)란 「희망하는 사람」의 뜻이었던 것.

객:우리 근대문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했는데, 어떤 측면에서입니까. 민족어로 쓰는 것이 가장 문학적일 터인데, 인공어로도 근대문학이 가능할까. 썩 궁금하네요.

주:세 가지로 고찰됩니다. (A)에스페란토로 번역된 서구문학을 우리 말로 다시 번역하기 (B)에스페란토로 직접 창작하기 (C)우리 작품을 에스페란토로 번역하기.

객:「폐허」표지에 나온 그 시는 (B)에 해당되겠군요. (C)는 어떠한가요.

주:김동인의 「감자」를 비롯, 김억의 「해파리의 노래」(자작시 번역), 유치진의 「소」등 부지기수지요. 제한적이긴 하나 우리 문학의 세계화는 이로써 시작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A)에 있다고 봅니다. 「오뇌의 무도」(1921)가 차지하는 시사적인 비중 때문이기도 하고.

객:김억이 서구 상징주의(세기말사상)시를 번역한 역시집 아닙니까.

주:이 역시집이야말로 우리 근대시의 전문화랄까 탈계몽주의를 가능케 한 원동력입니다. 이광수는 이 역시집이 나온 뒤로 새로 나오는 청년의 시풍이 온통 『오뇌의 무도화하였다』라고 평했는데, 사상뿐 아니라 시정신까지 그러했던 까닭. 가히 공곡의 전성이라 할만한 것이었지요.

객:그렇게 대단한 것이라면 그 이유는? 또 그것은 에스페란토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주:「오뇌의 무도」는 베를렌, 보들레르, 사맹, 구르몽, 포르등 프랑스 상징파 및 예이츠등의 시를 번역한 것 아닙니까. 이들의 시적 경향이란 향 색 리듬으로 요약되는 것. 관능과 정서를 통한 신천지를 열어 보이는 것. 그리움과 꿈, 그리고 몽롱함으로 요약되는 것.

객:그러한 것이 어째서 신천지의 전개인가요. 혹시 계몽적 이성으로 말해지는 장대한 서양의 형이상학의 압력에서 벗어나는 그런 몸부림이란 뜻인가요.

주:계몽적 이성의 그 엄청난 사상중압에서 벗어나 신천지를 개척함이란 관능(향, 색, 리듬)밖에 더 있을까. 일체의 이데올로기(계몽)에서, 의무에서, 명분에서 벗어나기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관능이 우리의 영혼에 닿아 있어야 하는 것. 영혼의 떨림이라고 할까.

객:영혼의 떨림이라? 영혼과 제일 닮은 색깔, 향기, 소리 등. 이른바 만상의 조응(Correspondances)을 방법론으로 한 것.

주:이 시집 맨 앞엔 베를렌의 「작시법」의 일절이 비석처럼 버티고 있습니다.

객:「무엇보다도 먼저 음악을!」이라고 외치는 그 유명한 상징파의 구호에 해당되는 것이겠군요. 사상도 이념도 윤리도 깡그리 배제하기.

주:김 억은 이 「작시법」을 1918년에 이미 번역해 보였지요(「태서문예신보」 제11호). 「웅변을 잡아서 목을 빼거라!」라고.

객:「폐허」창간호에도 그 「작시법」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주:개역을 한 것이지요. 그만큼 그는 이 「작시법」을 중요시했지요?

객:「오뇌의 무도」가 탈계몽주의랄까 내면화를 가능케 했다는 것, 김동인 염상섭의 이른바 근대소설에 대응된다는 것, 이로써 우리 근대문학은 일단 이원적 구조(계몽적 이성과 순수정서)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등등이 조금 짐작됩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에스페란토와 무슨 관련이 있느냐겠지요. 일본유학생 김억이 「오뇌의 무도」를 번역할 수 있었을까. 상징파 시란 지극히 번역하기 어려운 것 아닙니까. 웅변(말, 의미)의 목을 빼버린 것이니까. 혹시 에스페란토로 번역된 상징파 시들을 우리 말로 옮겼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까?

주:(1)원전에서 직접 번역하기 (2)일역된 것에서 중역하기 (3)에스페란토로 번역된 것에서 중역하기등의 가능성이 다 있지요. 베를렌의 「가을노래」, 「거리에 나리는 비」 등의 에스페란토 역과 기타 에스페란토로 번역된 세계시집들이 허다했으니까. 「오뇌의 무도」(재판)에 수록된 에로쉔코의 작품은 에스페란토잡지에 수록된 것이라 표기되어 있습니다. 유학도중 1916년에 이미 에스페란토 창작시를 썼고, 오산학교에서 에스페란토강습을 했고, 조선에스페란토협회(1920) 회두였던 김억이었기에.<문학평론가·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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