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400가구 단위로 “적구” 수용/도주 일가족 공개처형한뒤 돌팔매/임신 발각 여수용자 배걷어차 낙태/외부와 철저 격리… 실수로 들어가도 처벌/어린이도 인민학교 3년 마치면 곧장 중노동국가보위부 소속 경비여단의 함북 경성군 11호 관리소 경비대. 지난해 12월 귀순한 최동철씨는 83년부터 3년간 이곳에서 군복무를 했다. 경비대원은 4백명에서 5백명 정도. 국가보위부에서 관할하는 XX호 관리소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정치범 수용소라고 말하는 철저한 통제 구역이다.
최씨의 증언.
『관리소, 그러니까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우선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노동과 체벌이 있을 뿐이다. 물론 거주이전의 자유가 있을리 없다. 11호관리소에는 2만명 가량이 수용돼 있다. 결혼한 사람들은 분리 수용하고 미혼자들에게는 결혼이 허용되지 않는다. 어린이들은 인민학교(4년제)에서 3학년까지만 집단생활을 하며 산수와 말, 글을 배우고 곧바로 노동현장에 투입된다. 교사는 보위부원으로 채찍을 갖고 다닌다』
○어린이 셋은 총살
최씨가 경험한 도주자 처벌 현장.
『85년 7월 할머니와 아들, 손자 3명 등 일가족 5명이 도주하다 3일만에 붙잡혀 공개 총살 당했다. 일단 모두 한곳에 모아 놓았다. 그리고 총신이 4개인 고사총 4개를 네 귀퉁이에 수평으로 배치하고 소대 규모의 경비대원이 도주자 전면에 기관총을 들고 일렬로 정렬했다. 나머지 소총수들도 빈 공간을 빽빽이 메웠다. 어른 2명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10세가 안된 어린이 3명은 총살당했다. 수용자들은 조별로 시체를 보면서 그 앞을 행진한다. 이른바 「모범수」들은 자발적으로 시체에 돌을 던진다. 여기에 동조하지 않았다가는 무슨 화를 당할 지 모른다. 너도 나도 돌을 던지고 시체위에 돌무덤이 만들어진다』
관리소 수용자들은 대개 지주·자본가 2세나 6·25 당시 치안대(북한에 진주했던 국군에 협조했던 사람) 가입자,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반대자, 월남자, 그리고 그 가족들이다.
지난해 인민무력부 합영사업 담당자로 중국에서 남한측 인사와 접촉하다가 귀순한 최주활씨의 증언.
『남한사람들과 접촉했다는 것이 감시망에 걸렸다. 돌아가면 무조건 관리소(수용소)행이라 탈북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수용되면 평생동안 중노동과 농사에 시달려야 하고 빠져나올 수 없다. 개인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대개의 경우 자식도 낳을 수 없고 외부 출입도 금지된다』
북한에서는 「노동을 통해 계급성분과 사상을 개조한다」 「착취받고 억압받던 부모들의 지난날을 잊지 말자」는 등의 구호를 내세우며 반당 반혁명 수용자에 대한 가혹한 대우를 당연시한다.
○원수 후대 못 낳게
다시 최동철씨의 증언.
『여자 수용자가 임신한 사실이 확인되면 보위원은 임신부의 배를 걷어차 낙태시키고 그래도 안되면 임산부를 죽인다. 계급적 원수가 후대를 낳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여자 수용자를 강간한 보위원도 처벌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의 정절을 보호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계급적 원수와 몸을 섞었다는데 대한 처벌이다』
귀순자들에 따르면 관리소는 산간벽지에 위치하고 지역도 매우 넓다. 수용자들은 엄격한 감시 아래 3백∼4백 가구의 마을 단위로 살고 있다. 최씨가 근무했던 11호 관리소도 크기가 농경지 약 5백만평을 포함해 약 1천만평에 달했다.
수용자들의 거주지역은 적구라고 불리며 보위부원들의 숙소와는 완전히 차단돼 있다. 노동과제를 완수하지 못하면 구타 등 가혹한 체벌을 받는다.
관리소는 외부와 철저히 격리돼 운영된다. 절대출입금지를 알리는 팻말이 곳곳에 설치돼 있지만 워낙 넓은 지역이라 간혹 팻말을 보지 못한 민간인들이 실수로 들어 오기도 한다. 이 경우 이들은 3일간 구류 당한뒤 비밀을 엄수하겠다는 서약을 한뒤 훈방된다. 일반 외부인이 관리소에 볼 일이 있을 때는 관리소에서 수십 떨어진 연락소까지만 접근이 허용된다. 수용자가 사망했을 경우에도 내부 진입이 안된다. 친인척조차 시체마저 볼 수 없다. 사망통지를 받는게 고작이다.
최동철씨는 83년 함북 온성남자고등중학교를 졸업한뒤 좋은 성분과 성적으로 국가보위부 요원 선발 시험 대상자로 뽑혔다. 그는 기억력과 순간판단력 등을 가리는 진흥시험에 합격, 이른바 정치범 수용소 경비대원으로 국가보위부의 첫 업무를 시작했다. 관리소 경비는 최씨 같은 청년 엘리트들로 구성될만큼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업이다.
최씨의 증언.
『철조망과 함정, 모래 등을 통해 흔적을 파악할 수 있는 흔적선, 순찰로, 감시대, 잠복초소, 수류탄과 화살까지 동원된 탈주자 봉쇄 장치가 겹겹이 만들어져 있다. 여기에 담당 구역별로 경비대원의 감시와 잠복, 순찰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경비대원의 기본업무는 물론 수용자들의 도주 방지다. 도주자가 발견되면 「섯」이라는 구호를 외치고 공포를 발사한 뒤 계속 도주하면 사살 해버린다. 도주하다 잡히면 곧 죽음이다』
수용자에 대한 대면·감독 업무는 정식 보위부원이 담당한다. 이들은 안전원(경찰) 복장을 하고 있다. 수용자들은 자기들끼리의 대화 및 접촉 금지, 구역비밀누설금지 등의 관리교양을 철저하게 받는다.
○55세몸 너무 왜소
다시 최씨의 증언.
『경비업무 중 어린이 체격을 한 수용자가 「선생님」이라고 불러서 몇살이냐고 물어봤더니 55세라고 대답해서 깜짝 놀랐다. 인민학교 3학년을 마치고 곧바로 중노동에 투입돼 자라지 못한 것이다. 관리소내의 노동강도는 일반인의 3배 가량이다. 보수는 물론 없다(최씨는 어머니 이순옥씨의 수감으로 담배농장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다) 옷은 경비대원들의 군복을 회수해서 나눠준다. 그나마 재수가 좋아야 배급 받을 수 있다. 어려서부터 무거운 짐을 지고 다녀 대부분 퉁퉁붓고 말랐으며 키가 작다』
최씨는 또 『보위부에서 곳곳에 정보원을 심어놓아 (수용자들의) 저항은 생각할 수도 없다』며 『농사도 이들에게는 호강이고 젊거나 잘 못 보인 사람은 고생이 심한 탄광, 벌목장 등 이른바 「돌격대」에 차출된다』고 말했다. 말을 잘 들어야 병원이나 상점 같은 편한 곳에서 근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주민이 생각하는 남한/“미 예속 원수국” “동경의 대상” 상반/80년대까지 “없애야 할 존재” 부정시각 주류/대북방송·중 조선족 통해 “잘 산다” 인식 확산
민족의 원수이자 동경의 대상.
귀순자들이 밝히는 남한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상반된 평가이다. 「남한군대는 무조건 없애야 하는 존재」이며 「주한미군은 조선인민의 철천지 원수이자 남한은 미국의 예속국가」이지만, 「경제교류를 하면 북한이 먹힐 정도로 남한은 잘 사는 나라」이며 「앞에만 서면 저절로 문이 열리는 자동차가 있는 나라가 바로 남한」이기도 한 것이다.
『남한에는 핵무기가 1천여개가 있다고 들었다. 또 남한 군대는 돈을 벌기 위한 고용부대이므로 싸워도 여지없이 지고 말 것이라고 배웠다. 물론 남한군대가 우리의 원수라고 교육 받았지만 어쩌다 남한에서 온 전단이나 양말을 주우면 서로 가지려고 병사들 끼리 싸우는 형편이다』(최광혁)
『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게 되면 남한이 정식국가로 인정받기 때문에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올림픽 개최를 방해 해야한다는 교시가 내려 왔었다. 남한은 미국의 가난한 식민지이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 유학생들이 남한에 귀순하는 것을 보면서 혹시 남한이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독립국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안영길)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상반된 평가가 80년대말부터 시작됐으며 이러한 「남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주민들 사이에 점점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89년 평양축전과 이후 사회주의의 몰락과정을 지켜보면서 외부소식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남한의 사회교육방송을 은밀히 듣거나 노동신문의 남조선 소식란을 즐겨 읽는 주민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남한은 「별천지이자 억눌린 욕망의 해방구」였다.
『남한 TV는 매일 호화방탕한 내용과 여자 나체만 보여주는 줄로 알았다』(최광혁)
『북한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떠올랐던 곳이 남한이다. 많은 귀순자들이 사형당하지 않고 잘 산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귀순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었다』(안영길)
북한 주민들에게 과대포장 되기는 했지만 어느정도 남한 소식이 알려지게 된 것은 북한과 중국과의 왕래가 허용된 90년 부터이다. 남한 사정을 잘 아는 중국의 조선족을 통해서, 이들로부터 생필품등을 들여오는 북한의 보따리 장사들을 통해 「잘 사는 남한」의 소식은 급속히 퍼졌다.
당시 중국 연변에서 인민무력부 산하 용성무역회사에서 근무했던 최주활씨는 『90년 들어 막연히 남한과 자본주의 사회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아직 대다수 인민들은 남한이 북한보다 조금 잘 사는 것으로 알고 있는 정도이지만 어느정도 외국물을 먹은 당이나 군의 고위간부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만큼 남한사회를 동경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전국 15여곳에 20만명 수용 추정/기본권 박탈… 하루 12시간 노동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의 공식명칭은 「특별독재대상구역」이다. 실태와 규모는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귀순자 최동철씨는 전국에 20여개라고 주장했고 우리정부 관계자들은 15개 가량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체 수용자수는 20만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수용자들은 입소 순간부터 공민증을 압류당하고 면회와 서신교환이 금지되는 등 기본권을 박탈당한다. 이들은 하루에 12시간 이상 강제노동하고 1시간씩 사상교육을 받는다. 재판 등 공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처벌과 사형이 집행된다.
최동철씨가 경비대원으로 근무했던 11호(함북 경성군)를 비롯해 12·13호(함북 온성군), 14호(평남 개천군), 15호(함남 요덕군), 16호(함남 화성군), 22호(함남 회령군), 24호(자강 우시군), 29호(평북 천마군), 화천관리소(평양 승호구역), 수성관리소(함북 청진시) 등 전국에 깔려 있다. 정치범 수용소는 통상 XX관리소라고 불리며 국가안전보위부 산하 제7국(농장관리국)에서 관장한다. 이중 14호와 15호 관리소가 가장 규모가 크다.
□특별 취재반
이병규 정치2부차장
황상진 사회1부기자
김병찬 정치2부기자
김관명 사회1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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