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보·투서빈발 “총체적 동요현상”/대학생들이 내각 짜놓고 거사까지/김일성 사망후 당·군간부도 “불안감”/동구유학생은 요주의로 찍혀 24시간 감시/반체제 발각에 총살·가족숙청도 부지기수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씨 일행이 서방으로 탈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진지 불과 며칠만에 평양의 러시아대사관에서 북한보위부 조명길 하사가 서방망명을 요구하며 총격전을 벌인끝에 사살되는 등 북한체제의 이상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가장 최근에 귀순해온 최주활(46·북한인민군상좌·지난해 9월귀순) 안영길(39·북한인민군대위·지난해 10월귀순) 이순옥(49·온성군 물자공급책임원·지난해 12월귀순) 최동철(26·이순옥씨아들·국가보위부 경비대원) 최광혁씨(25·북한인민군하사·지난해 12월귀순) 등으로 부터 동요하는 북한체제의 실상을 들어본다.<편집자주>편집자주>
86년 봄 북한의 수재들이 모인 평성리과대학. 날카로운 신호음과 함께 국가보위부원 수백명이 이 대학에 난입, 학생 수십명을 「국가전복기도」혐의로 체포해가는 북한 정권 수립후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평성리과대학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한 최동철씨(당시 김일성종합대 재학중)의 증언.
○평성리과대학 사건
『학생들이 국가전복을 목표로 독서회를 구성, 치밀히 거사 준비를 해오다 발각된 사건이다. 그들은 「거사 성공후에는 누가 국가원수를 맡고 누가 국방장관을 맡는다」는 식으로 각료조직표까지 짜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김일성대 학생들에게도 큰 충격을 준 이 「평성리과대학 사건」은 결국 독서회 참여자 수십명을 총살하는 것으로 무참히 마무리됐다』
○체제동요의 신호탄
북한 체제 동요의 신호탄이 됐던 이 「평성리과대학 사건」이후 북한에는 예전에는 생각할 수 조차 없는 「체제도전」세력이 체제를 무너뜨릴수는 없었지만 끊임없이 등장했다. 최주활씨가 전하는 한 예.
『92년 봄 평양에서 근무하던 인민무력부 산하 대외사업국의 한 간부에게 「부인과 즉시 이혼하고 더이상 평양에서 살 수 없으니 고향인 함흥으로 내려가라」는 전출 명령이 하달됐다. 같은 시간 인민군악대장이었던 그 간부의 장인에게도 「반동의 씨를 뿌렸으니 앞으로 편하게 지낼 생각은 마라」는 내용의 통지문이 전달됐다. 이유는 대외사업국 간부의 처남이 친구들과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비밀결사조직을 구성, 「국가 전복을 꾀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독일 유학까지 했던 그는 결국 일주일후에 총살되고 아버지는 한달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북한 체제의 동요와 이를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북한의 감시·통제의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평양이후 더 심해져
『89년 제13차 평양축전과 동구권 몰락 이후 중앙당에 무기명 투서가 늘고 있다. 주로 당의 실책을 전면 비판하고 인민들의 고통을 말한 뒤 당·군·관 고위층 인사들의 부정부패 등을 당이 나서 척결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또 평양시 교외인 강남군에서는 북한체제를 비판하는 소위 「대자보사건」이 빈발하고 있으며, 대학생들이 김정일에게 직접 무기명 투서하는 경우도 잦아지고 있다』(최동철)
『헝가리 폴란드 체코 등 동유럽 유학생들은 아예 「요주의 인물」로 찍혀 24시간 감시를 받고 있다. 이들이 북한 체제를 비판하고 서구사상을 유입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대외사업국의 한 간부는 처남이 독일 유학시에 술자리에서 북한 체제를 비판하고 서방국가를 찬양했다는 이유로 군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나 자신도 후방총국 융성무역회사 일로 중국을 자주 드나들면서 남한사회를 동경하게 됐고 북한이 곧 망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최주활)
『북한에서 사람을 죽이면 무조건 총살형이다. 그러나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는 듯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빈번해지고 있다. 평남 평성에서 한 대학생은 여자 7명을 불에 태워 인육을 먹었고, 어떤 아들은 식량을 아끼기 위해 어머니의 이빨을 뽑았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로 지금 북한 사회는 모든 가치와 도덕이 붕괴하고 있다. 북한 체제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최광혁)
○남한에 막연한 동경
이같은 체제 동요의 근본 배경에는 80년대 말부터 급속도로 악화한 북한의 경제사정과 이에 따른 사회전반의 누수현상이 자리잡고 있다는게 귀순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특히 「2만여명의 외국인이 북한을 찾기는 한국전쟁 이후 처음」이었던 89년 평양축전은 북한 경제의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때부터 북한사회에는 규율도 없고 기강도 없는「총체적 누수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평양 축전 당시 중국에서 「외화벌이」에 한창이었던 최주활씨의 증언.
『평양축전을 말 그대로 「결사적」으로 준비하던 87∼88년, 인민들은「평양축전이 성공적으로 끝나기만 하면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당의 선전을 그대로 믿었다. 그러나 평양축전 이후 북한 경제는 오히려 파국으로 치달았고, 이때부터 인민들 사이에는 「남한이 우리보다 잘 산다」 「남한에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찻잔이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가 있다」는등 남한 사회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싹트기 시작했다.
또 94년 7월9일 김일성 사망 발표후 어느 부대에서는 군관들이 모여 앉아 카드놀이를 하다 들켜 문제가 됐다. 또 다른 부대에서는 간부들이 애도기간인데도 술까지 마셔 징계 처분을 받기도 했다』
심각한 경제난에 따른 뇌물 수수와 당이나 군 간부에 의한 식량배급시의 「유출」문제도 북한 주민들의 「민심 이탈」에 큰 요인이 됐다. 국경을 넘는 것도 경비병에게 뇌물을 주면 어렵지 않으며, 제대로 배급돼도 모자랄 식량을 간부들이 차례로 빼돌려 더욱 살기가 어렵다는 것.
○공공연히 간부원망
이순옥씨의 증언.
『북한 주민들의 식량은 양정사업소라는 데서 일괄적으로 배급한다. 규정량은 7백(콩 30%, 쌀 10%, 강냉이 60%)이지만 수송도중이나 배급중에 몇차례 간부들이 빼돌려 실제로는 3백 정도 밖에 안된다. 식량 3백이면 약과 3개 정도 분량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으로 하루를 버텨야 하는 북한 주민들은 간부들을 내놓고 원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북한 체제가 결정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89년 동구권의 몰락과 91년 소련의 해체가 보다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내가 북한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동구 사회주의가 붕괴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였다. 중학교때까지 사회주의가 최고라는 말만을 들으며 자랐는데, 그 사회주의가 처참히 붕괴했다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또 이때부터 「통일은 우리 손으로밖에 할 수 없다」며 식량배급도 줄어들어 생활은 더욱 곤궁해졌다』(안영길)
『소련 유학생들이 남한에 귀순하는 것을 보면서「왜 그 좋은 소련을 떠나 남한으로 갔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최광혁)
○김사망 “속시원해”
여기에 당과 군 간부들이 일시적인 아노미 현상까지 보인 94년 김일성의 사망은 북한 체제 몰락을 재촉한 결정타였다. 김일성의 사망은 일반 주민들에게는 『오래 살겠다고 무수한 인민을 착취하더니 나보다 먼저 죽었구나』(이순옥), 『애도기간에는 몸가짐을 조심했지만 이는 김일성이 죽은 것이 슬퍼서였기 때문이 아니라 애도기간에 싸우거나 술을 먹으면 총살한다는 명령때문이었다』(최광혁)
북한 주민들에게는 김일성의 사망이 애도대신 속시원한 사건이었지만, 김일성과 공동운명체로 생각했던 당과 군의 고위급 간부들에게는 「탈북」을 생각하게까지 만든 엄청난 사건이었고 김일성의 사망이 바로 북한체제의 근본동요 원인이라는게 귀순자들의 전체적인 지적이다.◎“반체제 뿌리깊지만 활동 미미”/「평양홍수 장발」김일성대삐라사건 등 숱한 소문/신분불안등 현실적 동기… 대부분 단발에 그쳐
64년 여름 북한전역에 홍수가 나자 평양거리에 헐벗고 머리를 깎지 못해 장발인 남녀 수백명이 쏟아져 나왔다. 검문결과 이들은 일체의 신분증도 없고 북한당국에 등록조차 안된 유령같은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조선노동당이 60년까지 주민증발급사업을 통해 계층분류사업을 벌이자 북한당국의 눈을 피해 수년간 지하실등에 숨어살았던 적대계층의 반체제인사들이었다. 평양에서는 이때문에 머리가 긴 사람은 무조건 보위부등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 소동이 벌어졌다.
「평양홍수 사건」이라고 불려온 이 소동은 북한에 반체제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반체제세력은 통제된 북한체제하에서 희미하게 명맥만을 유지해왔으며 이들이 벌이는 행동도 단발에 그치고 있다. 25시간여 만에 끝난 평양 러시아대사관 총격사건은 대외적으로 공표될 정도가 됐다는 점에서 그나마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총격전이 시사하듯 북한의 반체제운동은 정치적 성격이 약하다. 대부분의 동기가 신분불안, 생활불만등 현실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현재 북한에 존재하는 소수의 반체제세력이 정치적 성격을 띤 대규모 체제전복운동으로 발전할 것으로 보는 시각은 거의 없다. 이 때문에 북한의 붕괴는 상향식 반체제운동보다는 군사쿠데타등 권력층내부의 궁정쿠데타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게 다수설이다.
북한에서 군사쿠데타 기도로 유명한 것은 지난해 귀순한 최주활상좌도 거론한 「푸룬제 군사학교 불발쿠데타 사건」이다. 구소련 푸룬제군사학교 출신의 군장성 10여명이 반김정일 쿠데타를 모의하다 거사직전에 일망타진 됐다는 사건이다.
92년 우리측에 알려진 이 사건은 그러나 처음부터 정치적인 목적을 갖고 있었다기 보다 구소련의 KGB가 북한 군부내 스파이 명단을 누출시키자 지목된 장성들이 신변안전 차원에서 반란을 기도했다는게 정부측 분석이다. 또 90년대초 김영춘현총참모장이 군단장으로 재직하던 6군단(수도방위)의 장교들이 반란을 기도한 사건이 북경(베이징) 외교가등에서 쿠데타 기도사건으로 크게 부각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들 또한 밀수행위가 발각된 것이 거사의 직접적인 동기가 됐다는 것이다. 이밖에 70년대 한 대위가 김일성저격을 시도하다 사살된 사건등이 귀순자들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지식인층의 반체제활동은 귀순외교관 현성일씨가 13일 기자회견에서 『학습그룹등 작은 모임을 통해 체제전복을 논의하고 삐라등을 뿌린다』고 밝혀 주목을 끌었다. 80년대 후반 북한에 유학했던 조총련계 대학강사 이영화씨는 직접 이같은 학습모임에 참석, 그 존재를 확인하기도 했다. 이밖에 90년대초 김일성종합대학 삐라사건, 평성리과대학 독서회사건등이 발생, 대학가에 대대적인 사상단속선풍을 일으킨 적이 있다. 노동자계층의 반체제활동으로는 검덕광산 난동사건등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특별 취재반
이병규 정치2부차장
황상진 사회1부기자
김병찬 정치2부기자
김관명 사회1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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