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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3/기악(한국의 예맥: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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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3/기악(한국의 예맥: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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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0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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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국악으로 거듭난 “자연의 소리”/대학들 국악과개설 창작 등 활발/가야금산조 황병기,김윤덕에 배워 정남희가락 복원/대금 이왕직아악부출신 김성진이어 김응서 등 두각우리의 악기는 자연의 소리를 낸다. 그 음폭은 사람의 목소리에서 크게 벗어남이 없다. 음색도 그렇다. 대금의 구성진 소리, 백락지장 거문고의 격조나 인간사를 보는 듯 화려하고 풍자적인 가야금…. 이러한 기악의 예맥은 성악계통에 비해 정규교육의 틀을 통해 전승돼 왔다. 또 신국악 작곡이 60년대부터 맥을 잇고 있어 국악이 끊임없이 창작되고 생명을 얻고 있다.

정악은 궁중의 각종 의식, 임금과 왕세자의 행차, 궁중이나 양반가의 연회, 군대행진등에 쓰인 음악으로 일제강점기 왕실이 사라지면서 동시에 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그 명맥을 보존한 데에는 일제강점기 이왕직아락부의 아악생양성소와 51년 그 후신으로 설립된 국립국악원이 큰 몫을 했다. 또 59년 서울대 국악과와 국립국악중·고등학교가 설립된 후 각 대학에 국악과 개설이 잇따랐다.

이왕직아악부에서 가야금에선 김영윤이 많은 제자를 키워냈다. 양성소 4기생 장사훈은 학자로서의 업적도 크지만 거문고도 잘 탔다. 3기생 성경린(거문고)과 2기생 김천흥(해금)은 지금까지 생존한 원로들. 김천흥의 제자 강사준 조운조등이 각각 서울대와 이화여대에서 맥을 잇는다. 대금의 대가 김성진(4기)은 지난 1일 작고했지만 국립국악원의 김응서의 연주활동과 대학에 있는 이상규(한양대) 홍종진(이화여대)등의 제자양성이 활발하다. 피리에서는 김준현―정재국의 맥이 두드러진다. 정재국은 70년대초 피리산조를 처음 정립했고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다.

산조 역시 국악원과 각 대학에서 교육되고 있다. 속악교육 비중을 크게 한 서울국악예고도 60년 설립됐다. 산조란 남도 시나위가락을 도입해 만들어낸 기악독주곡으로 그 형식미와 연주기량이 매우 빼어나다. 등장한지는 겨우 1세기 남짓. 가야금이 시초이며 피리산조는 70년대에 정립되는등 지금도 발전중인 형식이다. 산조는 진양조에서 휘모리로 점차 빨라지는 장단과 판소리와 같이 계면조 평조 우조등 다채로운 조운용이 특징이다. 이 장단과 조의 짜임, 농현기법등의 차이가 제를 만들어 낸다.

가야금산조의 1세대는 19세기말∼20세기초 활동한 김창조 한숙구. 김창조의 선율은 김병호가 가장 가깝게 보존하고 있다. 김창조 밑에서 많은 제가 만들어지고 연주시간도 길어졌다. 최옥산류는 중중모리에서 우조로 일관해 장중한 느낌이며 농현이 무거워 풍류적 기풍이 난다. 김창조의 손녀 김죽파류도 많이 연주된다. 김창조―안기옥―성금연, 한금덕―정남희의 맥은 북한자료등을 통해 최근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다. 성금연류는 남편 지영희의 경기무악 굿거리장단을 삽입한 화려하고 변화무쌍한 가락으로 크게 인기를 끌었다. 딸 지성자가 이어받았으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황병기는 50년대에 김윤덕으로부터 배운 정남희가락을 보완, 지난해 「정남희제 황병기류」를 완성했다. 황병기는 정남희제가 잔 기교가 없는 대신 구성감이 좋아 격이 있는 편이라고 말한다. 김윤덕은 60년대에 따로 제를 만들어 자신의 맥을 잇고 있다.

거문고산조는 백낙준으로부터 시작해 신쾌동 한갑득이 명인으로 꼽힌다. 대금산조는 크게 박종기류와 강백천류, 종합적 성격의 한범수류가 있다. 이생강은 우조 평조 계면조에 메나리조까지 고루 섞고 음역도 2∼3도 확대해 120분까지 불고 있다. 피리는 음역이 좁고 소리가 거세 산조연주가 힘들다고 알려져 왔으며 가장 최근에 정립되었다. 앞의 정재국이 오진석의 남도시나위가락을 결합해 발표한 것이 처음이다. 지영희는 해금(지영희류)과 피리(박범훈류)에서도 경기시나위가락에 기초한 산조를 만들었다.

국악작곡가로 꼽히는 사람은 40∼50년대의 선구자 김기수부터 60년대이후 김용진 김희조 이성천 이상규 황병기 박범훈 김영동등으로 이어진다. 넘어야 할 과제는 많다. 음폭과 음량의 제한, 음정 불안등으로 표현력에 한계가 있는 국악기의 개량 또는 복원이 선결돼야 하며 작곡도 보다 체계화해야 한다.

국악이 특히 부각된 것은 80년대 이후. 전국적으로 국악관현악단이 많이 생겨났고 악기개량에도 적극적이었다. 많은 국악인들은 국악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높아진 계기로 88올림픽을 든다. 세계를 사로잡은 국악의 저력을 확인한 것이다. 현대인의 삶을 담아내는 창작을 통해 국악은 그 표현의 폭을 확대하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이것이 명기/대금 양쪽에 홈파진 쌍골죽이 최고/가야금은 돌사이 자란 오동나무 일품

명장에 적토마가 따르듯 명연주자에겐 훌륭한 악기가 있다.

대금은 쌍골죽(양쪽에 홈이 파진 대나무)으로 만든 것을 최고로 친다. 이 대는 속이 알차고 두툼해 저음은 부드럽고 중음은 아름답고 청아하며 고음은 청청한 소리가 한결같다. 그러나 쌍골죽은 병죽으로 대밭에서 곧 베어버리기 때문에 구하기가 쉽지 않다.

명인 김성진이 사용했던 쌍골죽대금은 50여년간 불어 삭힌 것. 전라도에서 올라온 어떤 이가 선사한 대를 동료 김보남이 깎아 만들어 유길수에게 준것을 그가 죽은 후 사들인 것이다. 이어 제자 김응서가 물려받아 대를 잇는 악기가 되었다. 김응서는 이 명기의 소리가 흩어짐 없이 무대 밖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보인다고 말한다.

거문고나 가야금은 앞면을 만드는 재료로 오동나무를 사용하는데 돌 사이에서 자란 석상동이 좋다고 한다. 다소 과장된 표현인지는 모르나 건조한 곳에서 자란 단단한 오동나무가 좋다는 뜻. 원래 재질이 무른 오동나무의 단단한 것을 씀으로써 음양이 조화된다.

황병기는 악기제작의 명인 김명칠이 초기에 만든 가야금을 쓰고 있다. 50년대에 구입한 이 가야금은 무대공연이나 해외연주때는 절대 쓰지 않고 음반녹음때만 쓴다.<김희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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