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민동요 무마 “전쟁불사론” 목청/김정일 “통일할테니 무기관리 잘하라” 교시/중 대당 연5∼6명 탈영 속출 “싸워봤자 뻔하다” 사기 바닥/식량난 심각… 체제위기의 「병영국가」 도발위험 경계해야지난해 10월말께 비무장지대로부터 불과 30∼40㎞ 떨어진 태탄 누천 구읍 등 북한의 3개 군 예비기지. 여느때 같으면 통상 12월1일부터 시작되는 겨울철 군사훈련을 위한 월동준비가 한창일 이 시기에 후방에 있던 폭격기와 전투기 200여대가 이곳에 전진 배치됐다.
이와 함께 서울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170㎜ 자주포와 240㎜ 방사포 70여문이 추가 배치됐고 국가안전보위부 소속 국경경비총국을 인민무력부로 이관, 인민무력부장이 이를 직접 장악하는 소위「전시지휘 체계」가 완성됐다.
당시 인민무력부 소속 1군단 69포병여단에서 하사로 근무하다 지난해 12월23일 귀순한 최광혁씨의 증언.
○「구 전시태세」 명령
『김정일이 전쟁을 밀접히 준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3월께 전군에는 「갱도훈련과 격술훈련을 강화하고 주간에 침식하고 야간에 훈련하라」는 특별교시가 하달됐었다. 더구나 11월에는 「현재 있는 무기로 조국통일을 할테니 무기 관리를 잘 하라」는 김정일의 훈련교시까지 내려와 「전쟁이 임박했다」는 위기의식이 동료 하전사(사병) 사이에 팽배해졌다』
지난해 10월 귀순한 전 후방총국 96공병대 대위 안영길씨의 증언.
『10월말 기동훈련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훈련의 70∼80%가 완성되는 3월말 이후에 전쟁이 발발할 확률이 높다. 게다가 3월말∼5월말 이 기간은 건기인데다 공격 목표물 파악도 용이한 때라 조짐이 안 좋다』
북한의 「전쟁 위기조성」은 92년부터 점점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는게 한결같은 증언이다.
92년 4월25일(인민군창립기념일) 김일성은 「인민군대의 싸움준비를 완료하여 조국통일을 앞당기자」는 훈련교시를 전군에 내렸고 이보다 10일 전인 김일성 생일때 김정일은 『포연에 그을린 원수복을 입고 싶다』고 공식 선언하기도 했다.
92년 8월 입대한 최광혁씨의 증언.
『입대하기전 주위에서 「95년 이전에 조국통일이 되니 나이 많고 사회 경험이 많은 사람을 군대로 보내라」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때 처음으로 「통일을 말로만 할 때가 아니다」라는 얘기도 들었다』
이같은 분위기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한 직후인 93년 3월과 김일성이 사망한 94년 7월을 고비로 더 한껏 고조됐다. 먼저 93년 3월6일에는 77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이후 16년여만에 처음으로 「준전시태세」명령이 하달됐다』
안영길씨의 증언.
『북한의 NPT 탈퇴 이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이 가까워지자 김정일 최고사령관 명령으로 「준전시태세」가 전군에 확립됐다. 「한 치의 땅, 한 포기의 풀도 다치지 못한다. 전쟁은 이제 1대1로 해야 한다」는 구호도 나돌기 시작했다』
북한 국가보위부 소속 정치범수용소 경비대원으로 근무하다 94년 탈북한 최동철씨의 증언.
『온성남자고등중학교 재학 시절인 80년대 초반 「82년 4월5일 전쟁이 일어난다」는 말을 동료나 주위 친척들로부터 들었다. 그러나 북한이 「우리에게는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도, 의사도 없다」며 NPT를 탈퇴할 때는 정말로 전쟁이 일어나는 줄 알았다. 왜냐하면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것은 치밀한 전쟁 도발 전략에 따른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다』(그는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단지 소문으로만 들었다고 말했다)
북한의 NPT 탈퇴 이후 전군에 내려졌던 「준전시태세」명령은 김일성이 사망한 94년 7월8일 밤을 기해 「전시태세」명령으로 바뀌었다. 「애도기간에 남한이 북침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전시태세」에 대한 최광혁씨의 증언.
『다음해(95년) 2월 내가 근무중인 69포병여단에 「주체포(170㎜ 고사포)」와 탱크가 들어오면서 전쟁 위기감을 느꼈다. 또한 전승기념일(휴전일)인 7월27일 김정일이 열병식에서 「다음 열병식은 조국통일이 된 뒤에 하겠다」고 말해 늦어도 96년 초에는 전면전이 시작될 것으로 믿었다』
이같은 북한의 객관적인 전쟁 위기감 고조와 함께 귀순자들이 빼놓지 않고 언급하는 대목이 군에서는 최고사령관으로, 사회에서는 위대한 영도자로 호칭되는 김정일의 호전적 성격이다. 91년 원수 추대후 끊임없는 「군심 달래기」를 통해 북한군을 확실히 장악한 것으로 알려진 김정일에 대해 귀순자들은 『포용력과 지도력은 없지만 독특한 과단성과 호전적 성격으로 전쟁 발발 위험이 더욱 커졌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미·일 카드」 속셈도
최주활씨의 증언.
『인민군관들의 대부분은 김정일을 인자함과 포용력은 없지만 강경함만은 인정받을 수 있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핵문제가 한창 대두됐을 때인 93년에 김일성이 「이러다 전쟁이 일어나면 어떡하나」하고 말하자 김정일이 「전쟁이 일어나서 지게 될 것 같으면 지구 전체를 깨버리겠다」고 담력을 뽐냈다는 얘기가 있다. 이러한 강경노선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면서 외부세계로부터 양보를 얻어내는 것이 김정일의 강점이다』
그러나 이같은 김정일의 전쟁 독려와 외형적인 전쟁 위기감 조성에도 불구하고 이를 「미·북 평화협정 체결과 북한 주민들의 경각심 고취를 위한 고도의 전략」으로 풀이하는 시각도 있다.
최주활씨의 증언.
『최근 빈번해진 북한의 「전쟁불사논」은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유·무형의 양보를 얻어내려는 일종의 「카드」일 수 있다. 또한 지난해 2월 북한의 명실상부한 제2인자 오진우인민무력부장의 사망 이후 군 실세로 등장한 간부들, 특히 최광총참모장을 중심으로 한 새 군수뇌들이 김정일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려고」주체포 등을 전진배치했을 수도 있다. 물론 최근의 병력 재배치와 무기의 전진배치가 말 그대로 유사시에 남한으로 빨리 침투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고 본다』
이 지적과 함께 주목할만한 것이 80년대 말부터 급격히 곤궁해진 북한주민 및 인민군들의 생활과 체제에 대한 불만, 이에 따른 군기 문란 및 김정일에 대한 「신심(충성심)」의 감소다.
이를 일시에 저지·만회하려고 내놓은 것이 최근 5년간 강도가 높아져 가고 있는 「전쟁불사론」이라는 것이다.
○구체적 징후는 없어
『지난 몇년간 북한군은 한 중대에서 일년에 5∼6명이 탈영할 정도로 군인으로서의 자긍심이 전혀 없어졌다. 위에서는 무력통일관을 확고히 세우라고 들볶지만 전사들은 속으로 「과연 싸움을 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한다. 「군의 사기도 저하돼 있고 전쟁 수행을 위한 예비물자도 모자라는 마당에 싸워봤자 뻔하다」는 식이다. 전쟁이 일어날 확률은 30% 미만이라고 본다』(최광혁).
『「김정일을 위해 죽겠다」고 생각하는 병사는 100명중 5명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기 시작한 89년부터 북한 사회 전반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고조돼 있고 식량문제는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전면전이 발발하면 (북한이) 지지는 않겠지만 매우 힘들 것이다』(안영길).
『80년대 말부터 식량과 부식 피복을 (배급이 안 돼) 군부대에서 자체 해결해야 할 정도로 군의 형편이 무척 곤궁해졌다. 후방부대의 하루 일과중 70%를 보급품 자체 해결을 위한 「부업」시간이 차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예전에는 「최소한 굶지는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던 군에서도 80년대 말부터 1개중대에 4∼5명꼴로 몸무게 34㎏ 이하의 영양실조에 걸린 병사들이 속출하고 있다』(최주활)
이러한 귀순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볼 때 북한의 「전쟁불사론」은 「구체적인 징후가 포착되기는 하지만 상당부분이 대내외 홍보를 위해 과포장된 전쟁위기설」일 공산이 크다.
그러나 북한은 김정일이 국방위원장 겸 북한군 최고사령관 자리에 앉아 끌고 가는 일종의 병영국가라는 사실은 한시도 우리의 방심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집중인터뷰 귀순자 5인
◎최주활 <북한인민군 상좌>북한인민군>
최주활씨(46)는 북한군 상좌(우리의 중령과 대령사이)로 지금까지 귀순한 북한군중 계급이 가장 높다. 체코주재 북한대사관 부무관과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 부부장, 후방총국 융성무역회사 합영부장 등 요직을 거쳤다. 중국에서 합영사업중 남한 인사들과 연계된 사실이 북한당국의 감시망에 포착돼 고민끝에 지난해 9월 귀순했다. 함북 청진시출생으로 78년 평양외국어대학 노어과를 졸업했다.
◎안영길 <북한인민군 대위>북한인민군>
안영길씨(39)는 인민무력부 직속 후방총국 양식국 참모(대위)출신으로 공병 장교이다.
73년 포병사령부 8훈련소에서 군생활을 시작해 78년 군관강습소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는등 빠르게 진급했다. 88년 이후 대위로만 7년여동안 근무하며 수차례 제대하고자 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아 불만을 가진끝에 탈북을 결심했다. 중국으로 탈출해 지난해 10월 귀순했다. 황남 태탄군이 고향이다.
◎이순옥 <온성군 물자공급책임>온성군>
이순옥씨(49)는 온성군 상업관리소 간부물자공급소책임자 출신으로 아들인 최동철씨(29)와 지난해 12월 귀순했다.
85년 당간부의 아들이 결혼할때 양복지를 제공하라는 요구를 거절했다가 잘못보여 87년 평남 개천교화소에 수감됐다. 6년2개월만에 석방돼 탈북을 결심했다.
94년 2월 중국으로 탈출해 조선족 친척집에서 도피생활을 했다. 함북 청진시 출신으로 청진 라흥기계공업학교를 졸업했다.
◎최동철 <국가보위부 경비대원>국가보위부>
최동철씨는 국가보위부 소속으로 김일성종합대 자동화학부에서 위탁교육받던 중 어머니 이씨의 수감으로 88년 4월 퇴학 당했다. 퇴학후 함북 온성군 담배농장에서 노동을 했다.
어머니가 석방된뒤 대학재진학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하자 탈북을 결심했다. 함북 온성군 출신으로 정치범수용소에서 국가보위부의 경비대원으로 3년간 근무했다. 남한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최광혁 <북한인민군 하사>북한인민군>
최광혁씨(25)는 92년 8월 군에 입대, 하사로 복무도중 지난해 12월 휴전선을 통해 귀순했다.
군복무시 열악한 환경에 대한 불만과 부대원과의 불화등으로 세차례 탈영했으나 그때마다 붙잡혀 영창생활을 했다. 평양출신으로 황북 사리원 지질대를 2년 다니다가 중퇴했고 황남 재령군 철제일용품 농장에서 2년간 근무했다. 황남 재령군 행정위원회 지도위원 출신인 아버지와 8명의 가족이 북에 있다.
□특별 취재반
이병규 정치2부차장
황상진(사회부)
김병찬(정치2부)
김관명(사회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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