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의 혼돈, 헷갈리는 시대에 살고있다. 나지막한 건물들을 주변에 깔고, 서초동 언덕 위에 우뚝 서있는 검찰청사의 위용은 대단하다. 느낌부터가 엄정하다. 이 곳을 거쳐 전직대통령 두 사람과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사람들이 줄줄이 감방으로 향했다. 그 위용 탓인지 약간의 흔들림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관념의 혼돈을 일으키게 한다.
얼마전 검찰은 전두환전대통령의 진술내용 하나를 공표했다. 5공신당을 추진하면서 500억원을 각계에 뿌렸다는 충격적 내용이다. 정치권과 각계를 들쑤셔 놨다. 그런데 막상 검찰은 이쯤에서 살짝 사족을 달았다. 「전씨는 돈을 건넸다고 말할뿐 더 이상의 내용은 입다물고 있다. 또 현금으로 건넸기 때문에 추적은 곤란하다」 말하자면 돈받은 사람이 누구이고 그 액수는 얼마인지는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평소 신중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검찰이 왜 검증할 수 없는 진술내용을 공표해, 스스로 허공에 집짓기와 같은 일을 했을까.
더 희한한 일은 검찰과 전씨 양측간의 공방이다. 그런 내용을 말한적 없다, 아니다 무인까지 찍었다며 서로 반박하고 나섰다. 정치권에서도 들고 일어났다. 야당은 야당대로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주장하고, 여당은 여당대로 총선분위기를 망치는 것 아니냐며 검찰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고 있다. 이 공방의 과정에서 12·12 및 5·18사건 수사의 참뜻은 공중으로 붕 떠버렸다. 헷갈리는 일이다.
검찰은 법앞에 만인이 평등하므로 위법했다면 기업인이라 하더라도 엄정하게 처벌받아야 한다며 재벌총수들에게 중형을 구형했다. 기업인들은 관행화했던 시절에 코가 꿰어 낸 돈을 왜 뒤늦게 와서 뇌물죄로 처벌하려 하느냐고 서운해 하고 있다. 기업의 국제경쟁력, 경제에 미치는 영향등을 왜 고려하지 않고, 더구나 저간의 사정은 왜 뚝 잘라먹는가고 서운해 하고 있다. 서운만 하는 선에서 그치면 좋은데 그 「서운함」 때문에 경제전반이 위축되고 있다. 애꿎은 중소기업들이 줄줄이 거덜나고 있다. 그뒤 신문 시사만평에는 청와대만찬에 참석한 기업인의 미소짓는 모습과, 「검」자 모자를 쓴 사람의 씁쓰레한 표정이 희화적으로 묘사됐다. 이것도 관념의 혼돈을 일으키는 일이다.
금천구청장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을 놓고 또 한차례 저마다 다른 소리를 내고있다. 야당은 표적수사라고 아우성이고, 여당은 표 떨어진다고 아우성이다. 엊그제 같은 배를 탔던 사람이 오늘은 반대편에 서서 똑같은 목소리를 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좌파정치인이니 극우보수주의자니 하며 매도하던 정당들이 바로 그 대상자를 영입이라는 포장을 씌워 지역구에 내보내고 있다. 보수·진보, 수구·개혁에 분간이 안간다. 관념의 혼돈이 여기서도 온다.
생활주변에서 오는 관념의 혼돈도 있다. 재미있는 비교 하나를 든다. 먹는 물과 휘발유는 그 값에서 얼마나 차이가 날까. 기계와 자동차를 움직이는 휘발유와 흔한 물을 비교하다니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먹는 물의 값은 어느새 휘발유 값의 3분의2 수준에 올라가 있다. 생수의 값은 소매가로 ℓ당 415원 가량이고 휘발유는 ℓ당 611원이다. 우리는 물을 공짜로 먹고 자랐다. 그 어린시절 석유가 무진장으로 나오는 중동의 사막지대에서 물을 비싸게 주고 사먹는다는 말을 전해듣고 킬킬대며 고소하게 웃은 기억이 난다. 관념의 혼돈과 더불어 고소하게 웃는 시대도 다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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