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용◁피의자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사건으로 군의 주도권을 장악한 후 1980년 2월중순 국군보안사령부(이하 「보안사」라 한다) 정보처 산하에 언론대책반을 설치하여 계엄사의 보도검열 업무를 조정·감독하게 하고, 3월중순 케이(K)공작계획을 수립하여 언론계 중진들과의 개별 접촉을 시도하는 한편 4월14일 자신이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임하게 되면서 그 영향력을 점차 국정 전반으로 확대하여 가던중 5월초에 이르러 대학가의 시위가 정치 투쟁의 양상으로 변모해 가면서 가열되자, 상피의자 전두환은 보안사 참모들에게 군이 전면에 나서 정국을 장악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검토할 것을 지시하고, 상피의자 이학봉 대공처장, 같은 허화평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같은 허삼수 인사처장, 권정달 정보처장, 정도영 보안처장 등이 수차례 논의한 결과, 비상계엄 전국확대, 비상기구 설치, 국회 해산을 「시국수습방안」으로 하기로 정리하여 5월4일께 보안사에서 피의자와 상피의자 노태우, 같은 유학성, 같은 황영시, 같은 이학봉, 같은 차규헌, 같은 허화평, 같은 허삼수 등에게 설명하여 동의를 얻고, 상피의자 전두환은 5월 12일께 권정달로부터 위 시국수습방안에 대하여 보고 받은 다음,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군지휘관들의 지지결의를 유도함으로써 전군의 의사를 배경으로 하여 이를 추진하기로 하고, 유학성은 5월15일께 육본 참모총장실에서 같은 이희성의 동의를 받고, 상피의자 전두환은 5월초 같은 이학봉에게 소요배후조종자와 부정축재자에 대한 수사를 지시하고, 상피의자 이학봉은 같은 허화평, 권정달과 함께 「국기문란자 수사계획」과 「권력형부정축재자 수사계획」 등 두개의 보고서를 작성, 5월15일 상피의자 전두환에게 최종 보고하고, 상피의자 전두환은 이들을 검거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함으로써 피의자는 국정을 장악하기 위해 국회를 해산하는 동시에 입법·행정·사법을 통제하는 비상기구를 설치·운영할 계획을 마련하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 수단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계엄군 병력이 전국의 주요 대학과 국회, 언론기관 등에 배치되는 것을 계기로, 향후 상피의자 전두환 등의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제압하고 피의자 등의 국정 장악에 반대하여 저항할 것으로 예상되는 주요 정치인과 재야 인사, 학생운동 지도자들을 소요배후 조정이나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하여 제거하는 등의 방법으로 헌법기관인 대통령, 국회 및 행정부를 계엄 상황을 이용한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할 것을 목적으로 상피의자 전두환, 같은 노태우, 같은 유학성, 같은 황영시, 같은 이희성, 같은 주영복, 같은 차규헌, 같은 이학봉, 같은 허삼수, 같은 허화평과 순차 공모하여 1980년 5월17일 11시께 서울 용산구 용산동 소재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육·해·공군 주요 지휘관 43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전군주요지휘관회의 중 상피의자 주영복이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에 대한 의견을 묻자, 안종훈육군군수사령관이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는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반대 의견을 표명한데 대하여 피의자는 사회 안정을 위하여 군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상피의자 노태우, 같은 황영시도 이에 동조함에 따라, 상피의자 주영복은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전군 주요 지휘관들의 의견으로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참석자들로부터 백지에 연서명을 받아, 상피의자 주영복, 같은 이희성은 17시10분께 최규하대통령을 찾아가 상피의자 주영복이 전군주요지휘관회의의 결론으로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건의하면서 일부에서는 비상기구의 설치와 국회 해산 문제도 거론되었다고 보고하자, 최규하대통령이 19시께 계엄 확대 방안에 대해서만 국문회의에서 논의해 볼 것을 지시하고,
5월18일 01시10분께 특전사 7공수여단 소속 장교 94명, 사병 680명이 엠(M)16 소총등을 휴대하고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를 점거한 상황에서, 08시께부터 전남대학교 학생 30여명이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학교 정문앞에 모여 시위를 하기로 한 사전행동지침에 따라 광주 북구 용봉동 300소재 전남대학교 정문에 모이기 시작하여 10시께는 200여명에 이른 학생들이 공수부대원들의 학내 잔류 학생에 대한 구타행위를 비난하면서 비상계엄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고 돌을 던지는등 시위를 하자, 위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의 강제 해산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어깨외에 머리등을 무차별 가격하고 체포한 학생들을 난폭하게 연행하여 충돌이 발생하고, 학생들이 10시30분께 다른 학생 600여명과 함께 광주 시내 중심지로 이동 집결하여 계엄해제,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등을 요구하면서 경찰병력과 격렬한 공방을 벌이는등 시위가 확산되자 피의자는 상피의자 전두환, 같은 이희성, 같은 황영시와 함께 광주 서구 치평동98소재 전투병과교육사령부(이하 「전교사」라 한다)등으로부터 위와같은 시위상황을 보고받고, 광주에서의 시위가 피의자등의 정국장악에 상당한 장애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의 확산을 우려하여 광주시위 상황에 대한 언론보도를 통제하면서 강력한 진압이 예상되는 공수부대의 시내투입과 증파로 이를 조속히 제압할 의도하에 상피의자 이희성은 윤흥정전투병과교육사령관(이하 「전교사령관」이라 한다)에게 계엄군을 투입하여 조속히 시위를 진압하라고 독려하고, 위 윤흥정은 다시 정웅31사단장에게 7공수여단 33, 35대대를 광주시내로 투입, 시위를 진압하도록 지시하여,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위 부대원들이 금남로일대로 출동, 16시께부터 시위대를 해산시키면서 인근점포나 골목, 건물안까지 시위대를 추적하여 체포하고, 그 과정에서 시위대와 시민들을 구분없이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심지어 머리를 가격하거나 체포된 시위대의 상의등을 벗기고 기합을 주기도 하는등의 과잉진압을 실시하여 광주시민 405명을 연행함과 동시에 80여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상피의자 황영시는 5월18일 오전 같은 이희성에게 합수부측에서 광주지역에 병력을 증원하여 시위를 조속히 진압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보고하면서 1개 공수여단의 증파를 건의하고, 같은 이희성은 같은 황영시와 김재명작전참모부장으로부터 병력증원을 건의받고 김재명에게 1개 공수여단의 증파를 지시하고, 피의자는 김재명과 협의하여 증파부대로 11공수여단을 지정, 광주에 출동시키기로 결정한후 15시30분께 11공수여단이 주둔하고 있는 동국대학교로 가 최웅11공수여단장에게 광주에 가서 임무수행을 잘 하라고 지시하고, 이에따라 11공수여단 병력장교 162명, 사병 1,038명은 5월19일 00시50분께 엠(M)16 소총등을 휴대하고 광주에 증파되어 차량에 탑승하고 배속받은 장갑차의 선도로 위력시위를 하고, 한편 전날 부상을 입은 시민 김경철(남·23세)이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후두부열상등으로 사망한데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난무하면서 광주시민들의 분노를 자극하여 5월19일 10시께부터 시민들이 대규모로 가세하면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항의하며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자 이들을 소총 개머리판과 진압봉으로 무차별 가격하고 심지어는 일부 부대원들이 대검을 사용하는등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하여 그 과정에서 많은 광주시민들이 부상을 입고, 그중 김안부(남·34세)가 전두부열상등으로 사망하고,
그 무렵 상피의자 전두환은 광주지구 보안부대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으면서 그 보고 및 조치가 미흡하다고 판단하여 5월19일 최예섭보안사기획조정처장과 홍성률 1군단 보안부대장, 최경조대령, 중앙정보부 박정희과장을 광주에 파견하여 상황을 보고받거나 연행자 조사 등을 지원하도록 하는 한편 상피의자 이희성에게 시위의 조속한 진압을 요구하고, 피의자는 전교사 2층 감찰참모실에 임시 사무실을 만들고 전교사 기밀실에 특전사 전용 상황실을 마련하여 전용 무전기로 상황을 보고 받으면서 수시로 공수여단장들과 진압 대책을 논의하고, 상피의자 전두환은 현지로부터의 건의에 따라 같은 이희성에게 시위 진압에 소극적인 윤흥정전교사령관을 교체하도록 요구하고, 상피의자 황영시는 같은 전두환과 논의하여 같은 이희성에게 그 후임으로 소준열육군종합행정학교장을 추천하고 5월20일 18시께 그에게 내정사실을 통보해 주면서 사태가 수습되면 중장으로 진급시켜 주겠다고 약속하여 5월21일 16시30분께 미리 전교사로 내려가게 한 뒤 5월22일 10시 전교사령관으로 취임하게 하고, 위 윤흥정을 체신부장관으로 추천하여 입각하게 하는 한편, 피의자는 상피의자 이희성, 같은 황영시와 함께 5월20일 다시 엠(M)16 소총등을 휴대한 3공수여단 병력 장교 255명, 사병 1,137명을 광주에 증파, 시위 진압에 투입하여, 오후 들어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에 격분한 택시기사들이 중심이 되어 차량 시위가 전개되면서 트럭, 버스 등의 돌진 공격이 계속되자 3, 7, 11 공수여단 병력들이 최루탄과 진압봉을 사용하여 진압을 계속하고, 24시께 광주역 앞에서 3공수여단 12, 15대대 장교들이 시위대의 차량공격에 대응 발포하여 많은 광주 시민들이 부상을 입고 김재화(남·25세)등은 총상을 입고 사망하고,
피의자는 상피의자 이희성, 같은 황영시와 함께 5월21일 10시께 정웅31사단장으로부터 전교사를 통해 시위대의 주장 내용이 정치적인 것이므로 물리적인 수습보다는 정치적인 수습이 최선이라는 내용의 사태 수습방안을 건의받고, 08시께부터 전라남도청(이하 「전남도청」이라 한다) 앞에서 수만명의 시위대에 의해 철수를 요구받고 있는 11공수여단 대대장들로부터 필요한 대책을 강구하여 줄 것을 건의 받았으나 이를 무시함으로써 12시께 전남대학교 앞에서 3공수여단 병력이 차량 공격등을 시도한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성명불상 운전사 등이 총상으로 사망하고, 13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11공수여단 병력이 장갑차와 버스를 이용하여 돌진해 오는 시위대에게 발포를 시작하고, 이어 인근 건물 옥상에 배치된 병력들이 시위대를 향하여 집단적으로 발포하여 박민환(남·25세)등이 총상으로 사망하는 등 상당수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이에 따라 시위대들이 광주를 비롯한 인근 지역의 경찰서, 지·파출소 등에서 총기와 실탄을 확보하여 무장 저항을 시작하자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도청 일대에서 이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피의자는 상피의자 전두환, 같은 황영시, 같은 이희성, 같은 주영복과 함께 광주에서의 시위와 시민들의 무장 상황을 보고받고 피의자등의 시국수습방안에 따라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강경진압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여, 광주에서 피의자들의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저항하는 시위대를 무장 폭도로 규정하고 그 정을 모르는 계엄군으로 하여금 광주 외곽을 봉쇄하고 자위권 발동이라는 명목으로 발포를 하게 하여 사상자가 발생하더라도 조속히 진압할 것을 결의하고,
상피의자 이희성, 같은 주영복은 5월21일 16시35분께 국방부장관실에서 상피의자 주영복, 진종채2군사령관, 정도영보안사보안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열어 계엄군을 광주 외곽으로 전환 재배치하여 외곽을 봉쇄하고 1개 연대를 추가 투입하며 「폭도 소탕작전」을 5월23일 이후에 의명 실시하고 자위권을 발동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를 언론을 통해 생중계로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상피의자 황영시는 5월21일 16시께 이구호 기갑학교장에게 기갑학교 전차 1개 대대(32대)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진압할 것을 지시한 데 이어 그 무렵 김기석전교사부사령관에게 무장헬기 및 전차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조속히 진압할 것을 지시하였으나 거절당하고, 상피의자 이희성은 5월21일 19시30분 육본 기밀실에서 방송을 통하여 위 회의에서 정도영보안처장이 전해 준 내용대로 자위권 보유를 천명하는 경고문을 발표하고, 이어 20시30분께 전교사령관을 통해 3개 공수여단과 20사단 등에 자위권 행사를 지시하고, 이에 따라 그 무렵 광주 외곽으로 재배치되고 있는 계엄군들에게 자위권 발동이 고지되고 실탄이 분배됨으로써,
5월21일 22시10분께 광주 서구 백운동 소재 효천역 부근에 배치되어 광주―목포간 도로를 차단하고 있던 20사단 61연대 2대대가 지프의 선도하에 트럭, 버스 등 차량 6∼7대에 탑승하고 목포쪽에서 오던 시위대와 교전하여 시위대 버스 2대를 전복시키고, 5월22일 00시15분께 61연대 1대대 1중대와 연대 수색중대 병력이 증원되어 다시 01시께 위 61연대 병력이 광주쪽에서 버스 5∼6대에 탑승하고 온 시위대와 교전하는 등 두차례의 교전 과정에서 시위대 성명불상자 등을 총상으로 사망하게 하고 5월22일 00시40분께 3공수여단 병력은 차량 6대에 분승하여 광주 북구 문흥동 88의1 소재 광주교도소에 접근한 시위대와 교전하고, 09시께 다시 2.5톤 트럭에 탑승하여 기관총 사격을 하면서 광주교도소에 접근한 시위대 6명과 교전하여 그 과정에서 서종덕(남·17세) 등을 총상으로 사망하게 하고 5월22일 08시30분께 효천역 부근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매복중이던 20사단 61연대 2대대 병력이 그곳을 빠져나가려던 승용차에 총격을 가하여 탑승자 중 왕태경(남·26세)을 총상으로 사망하게 하고 5월22일 16시께 20사단 62연대 2대대는 동일 17시까지 광주 서구 화정동 소재 국군광주통합병원을 확보하라는 지시에 따라 장갑차 3대를 선두로 하여 통합병원쪽으로 이동하던 중 이를 저지하는 무장시위대와 민가 지역에서 교전하여 17시50분께 통합병원을 재장악하고 그 과정에서 무장 저항하던 성명불상자 등 수명을 총상으로 사망하게 하고 해남에 주둔하고 있던 31사단 93연대 2대대는 부근 우슬재와 복평리에 매복중 5월23일 05시30분과 10시께 두차례에 걸쳐 시위대와 총격전을 벌여 그 과정에서 박영철(남·27세) 등을 총상으로 사망하게 하고 5월23일 08시25분께 광주교도소 부근에서 3공수여단 병력이 안병섭(남·22세)을 총격하여 총상으로 사망하게 하고, 09시께 11공수여단 62대대가 매복하고 있는 광주 동구 주남마을 부근 광주 화순간 국도를 광주방면에서 화순방향으로 진행하던 미니버스가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질주하자, 위 부대원들이 집중 사격하여 버스에 타고 있던 박현숙(여·16세) 등 10여명을 총상으로 사망하게 하고 5월24일 01시30분 11공수여단에 현 주둔지인 주남마을에서 광주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라는 전교사의 지시가 하달되자, 11공수여단이 13시30분께 주남마을을 출발하여 육로로 이동중, 그 선두가 광주―목포간 도로에 접한 광주 서구 진월동 소재 효덕국민학교 삼거리 부근에 이르렀을 무렵 트럭을 타고 그곳에 와 있던 무장시위대 수명을 발견하고 총격전을 벌이자, 뒤따르던 병력들도 주변을 향해 일제히 총격을 가하여 효덕국민학교 뒤 놀이터에서 놀던 전재수(남·11세), 부근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놀던 방광범(남·12세)을 각 총상으로 사망하게 하고 13시55분께 11공수여단의 선두 63대대가 효천역 부근에 이르렀을 무렵 오전에 20사단 61연대와 임무를 교대하여 부근에 매복하고 있던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대 병력이 위 63대대 병력을 무장시위대로 오인하여 선두 장갑차와 후속 트럭에 90밀리 무반동총 4발을 명중시키는 등 집중 사격을 가하여 공수부대원 9명이 사망하자, 최웅11공수여단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피의자는 최웅에게 현장파악을 지시하고, 63대대 병력은 부근 일대를 수색하여 무장시위대를 체포하면서 성명불상 무장시위대 1명과 시위대로 오인받고 체포된 마을 청년 권근립(남·33세) 등을 총격하여 각 총상으로 사망하게 하고,
상피의자 전두환 등은 전남도청을 근거지로 저항하고 있는 시민과 학생들을 무력으로 조속히 진압할 의도하에, 상피의자 이희성은 5월23일 09시부터 육군참모총장실에서 진종채 2군사령관으로부터 외곽으로 물러나 있던 병력의 광주 재진입작전 계획을 보고받은 후 현지 지휘관의 가용시간 등을 고려하여 5월25일 02시이후에 의명 개시하도록 결정하고, 상피의자 전두환은 5월23일 오후 피의자를 통하여 소준열전교사령관에게 친필 메모를 보내 공수부대의 사기를 고려해 주고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사태를 조기에 수습해 줄 것을 당부하고, 그 무렵 상피의자 황영시도 위 소준열에게 전화를 하여 희생이 따르더라도 사태를 조기에 수습해 줄 것을 요구하고, 이에 위 소준열이 김순현전교사전투발전부장에게 광주 재진입작전 계획인 「상무충정계획」을 마련하도록 지시하고, 한편 상피의자 이희성은 5월25일 04시께 김재명작전참모부장에게 광주 재진입작전 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하여 육본 작전지침인 「상무충정작전」을 만들어 12시15분 국방부내 육군회관에서 상피의자 전두환, 같은 주영복, 같은 이희성, 같은 황영시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위 상무충정작전을 5월27일 00시01분 이후 실시하기로 최종 결정하고, 상피의자 황영시는 5월25일 오후 김재명작전참모부장과 광주에 내려 가 소준열전교사령관에게 이를 직접 전달하고, 피의자는 위 소준열에게 재진입 공격지점별로 각 공수여단의 특공조를 지정하여 주고, 위 소준열이 5월26일 10시30분 전교사령관실에서 20, 31사단장, 3, 7,11공수여단장, 전교사예하 보병학교 교장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압작전 지휘관회의를 개최하여, 각 공수여단별로 특공조를 편성하여 전남도청 등 목표지점을 점령하여 20사단에 인계하기로 결정하면서 작전시각은 보안상 추후 통보하기로 한 후, 16시께 광주비행장을 방문하여 3, 7, 11공수여단장에게 5월27일 00시01분 부로 작전을 개시할 것을 지시하고, 피의자는 5월26일 오전 상피의자 전두환을 방문하여 재진입작전에 필요한 가발을 지원받고, 14시께 같은 이희성을 방문하여 충격용 수류탄과 항공사진을 지원받고 21시께 이들 장비 및 특전사에 있던 편의복을 가지고 광주비행장에 도착, 예하부대원을 격려함으로써 재진입작전 준비를 마치고 23시께부터 공수여단 특공조에 의한 침투작전이 실시되어 3공수여단 특공조 11대대 1지역대 장교 13명, 사병 66명은 5월27일 04시께 전남도청 후문에 도착, 도청 후문을 넘어 최후 항쟁을 결의하고 남아 있는 무장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진입하여 05시21분 전남도청을 점령하고, 7공수여단 특공조 33대대 8, 9지역대 6개 중대 장교 20명, 사병 181명은 5월27일 05시06분 광주공원을 점령하고, 11공수여단 특공조 61대대 4중대 장교 4명 , 사병 33명은 04시46분 제1목표인 전일빌딩과 관광호텔을 저항없이 점령하고, 이어 06시20분 여자기독청년회(YWCA) 건물을 총격전 끝에 점령하여 모두 295명의 시위대를 체포하면서 이날 광주 재진입작전 과정에서 특공조 부대원들이 총격을 가하여 이정연(남·20세) 등을 총상으로 사망하게 함으로써 피의자 등의 정국 장악을 위한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계엄군 투입 및 정치인들의 체포에 반대하고, 전두환의 퇴진과 민주화 추진을 요구하면서 광주에서 발생한 학생, 시민들의 시위와 저항을 병기를 휴대한 계엄군으로 하여금 강경 진압하면서 발포에 이르게 하여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광주 시민인 위 이정연 등을 각 살해하고,
계엄하에서 김대중내란음모사건 등에 대한 재판이 계속 진행되어 9월17일 제1심 선고 공판에서 김대중에게 군검찰관의 구형대로 사형이 선고되고, 11월3일 항소심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대법원에 상고된 상태에서 상피의자 노태우는 감형 방안을 마련하여 1981년 1월초순께 한용원보안사정보처장으로 하여금 피의자를 비롯하여 상피의자 황영시, 같은 유학성, 같은 이학봉, 같은 차규헌, 같은 허화평, 같은 허삼수 등에게 설명하게 하고, 상피의자 전두환은 이를 채택하여 1981년 1월23일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되자 같은 날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그 다음 날인 1월24일 24시까지 비상계엄상태를 유지하는 등 폭동함으로써 피의자는 주요임무종사자로서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등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및 민주화 추진을 요구하는 광주 학생·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등 폭동하여 내란함과 동시에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여 반란하고, 상피의자 전두환, 같은 황영시, 같은 이희성, 같은 주영복과 공모하여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위 이정연 등 광주시민들을 각 살해한 자로서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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