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사상 담아 「국민국가」 만들기/지역·가문·계층이 분리되었던 시절/출판통해 「상상의 공동체」 창출 열망/외래문물 목마른 18세소년 인쇄기 구입 귀국 「소년」 창간/「경부철도」 타고 「세계일주가」 부르며 바닷가의 소년은 세계속으로 달려(객):화두를 근대성으로 잡았으니 이 과제를 머릿속에 두지 않을 수 없겠는데, 근대성에 대해 어느 정도 개념규정부터 해둘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계몽주의의 범주에서 설명함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계몽이란 글자 그대로 어두움을 열어 보인다는 것 아닙니까. 인간이성의 전개과정, 그러니까 헤겔식으로 말하면 자유의 전개과정, 베버식으로 말하면 마법(미신)에서 벗어나기로 요약되는 것 아닙니까.
(주):인간정신은 주체적이라는 것, 인간은 좀 더 완벽한 데로 진보한다는 세계관(신념) 위에 선 것이지요.
(객):그렇다면 또 다른 설명방식도 있다는 말이겠는데, 왜냐하면 신념이란 여러 가지 중 선택된 하나인 것이니까….
(주):인간의 진보란, 실상은 없는지도 모른다는 신념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역사가 단선적으로 전개되어 왔는가, 복선적으로 전개되어 왔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런 논란을 거듭하고 있음에서도 이 사정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까.
(객):세계관 또는 지식이란 실상 고고학의 일종이라 갈파한 것이 「말과 사물」의 철학자 미셸 푸코였던가요. 현재 우리가 서 있는 땅을 한 층 파보니까 별개의 세계관(인식의 체계)이 나타나지 않겠는가. 그 밑을 파보니까 이번엔 또 다른 인식의 체계가 드러나지 않겠는가. 연속성이 아니라 단절로 이루어졌다는 것, 그런 설명모델로 우리 근대문학을 바라보면 어떠할까. 한 가지 설명모델이 될 수도 있으니까. 첫번째 글(95.1.12)에서 선생이 제시한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년)의 문체도 그것이었으니까.
(주):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말해 볼 수도 있지요. 가령 우리의 전통적 그림 속엔 민화가 있지 않습니까. 거기엔 원근법이 없지요.
(객):원근법이란 서양화에서나 있는 것 아닙니까.
(주):꼭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서양의 경우에도 근대적 원근법이란 데카르트의 균질적 공간인식 이후의 산물이니까. 그러니까 역사의 어느 단계에서 나타난 사물을 인식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 말해질 것입니다. 인상주의화가들이 철저히 거부한 것이 이 근대적 원근법이니까.
(객):음악도 그렇겠지요. 넓게 보아 우리의 경우 전통음악이란 궁 상 각 징 우 5음을 기본율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민요의 경우에서도 이 점이 느껴지지요. 「새야 새야 파랑새야…」도 그러하고.
(주):서양음악의 경우는 어떠할까. 보통 7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반음이 두 개씩 끼여 있고.
(객):알겠습니다. 선생께선 한 가지 도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근대(modern) 를 가운데 놓고 그 이전을 전근대(premodern), 그 이후를 후근대(postmodern) 라 갈라보면 어떻겠느냐. 그런 도식으로 우리 문학을 설명해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
(주):주자학적 안경으로 사물을 보아오던 시기가 있었지 않았던가. 비유컨대 5음체계로 된 안경, 원근법 없는 안경으로 세계를 본 것이지요. 이를 편의상 전근대로 부르면 안될까.
(객):이번엔 그 안경이 7음의 안경, 원근법 있는 안경으로 바뀌었겠군요. 그러자 사물이 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것을 근대라 부르면 안되겠느냐, 앞섰다든가 뒤졌다와는 관련없이 좌우간 다르다, 새롭다 식으로….
(주):가면이 없으면 춤추지 않는다는 처지, 곧 무슨 안경이든 써야 사물이 보인다는 시각에서 보면 그런 논법이 가능하겠지요.
(객):그렇다면 안경 없이 맨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다는 입장에 서는 리얼리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주):흔히 리얼리즘을 두고, 맨 얼굴(눈)로 사물보기라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 역시 또 다른 안경의 일종이라 할 수 없겠는가. 언문일치도 마찬가지.
(객):서당식 교육제도에서 서양식 학교제도로 바뀌었을 때 5음계음악, 원근법 없는 그림이 거부되고 7음계음악으로, 원근법 있는 그림으로 교육내용이 달라졌다면, 그것이 근대의 징후라면 문학의 경우는 어떠했던가. 「구운몽」이나 「춘향전」에서 「혈의 누」라든가 「무정」으로, 「새야 새야 파랑새야」에서 「해에게서 소년에게」로 바뀌었던 것이겠지요. 먼저 「해에게서 소년에게」에 대한 견해부터 듣고 싶은데요. 륙당 최남선의 「신체시」라 부르는 것, 우리 신문학의 기점으로도 말해지는 유명한 작품 아닙니까.
(주):「소년」(1908.11) 창간호에 실린 시지요. 발표 당시엔 그냥 「시」라고 목차에 나와 있지요. 일본의 「신체시」와 유사한 점이 있을지 모르나 그대로 닮았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소년」지는 그 무렵 쏟아져 나왔던 많은 교과용 도서의 일종이었고, 박물학적인 지식을 담은 잡지였지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무크(Mook)지의 일종. 주제별 특집 성격을 보이는 것이 권두시입니다. 창간호가 바다특집이었으니까 「해에게서 소년에게」일 수밖에요. 매호 권두시가 있었던 것. 가령 「꽃두고」는 꽃특집호 권두시였던 것. 「소년」지는 4년동안 모두 23권이 나왔고 많이 찍은 호는 약 1,000부였지요. 당시 신문보다 많은 부수입니다.
(객):바이런의 장시 「Child Harold의 순례」(Pilgrimage of Child Harold)의 마지막 대목(제4편 끝부분)과 유사하다는 연구가들의 지적도 있습니다만.
(주):그보다는 소년이 바닷가에 서 있다는 점이 중요하지 않을까. 마음 가난한 자가 소년 아닙니까. 외래문물이 밀려 오는 곳이 바다 아닙니까.
(객):속에 아무것도 든 것 없는 소년이 무방비로 외래사상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 그만큼 단세포적인 개화찬가라는 것….
(주):중요한 것은 그런 내용해독보다 육당이 차린 인쇄소(출판사)입니다. 육당이 황실유학생으로 일본에 간 것은 1905년 나이 15세적. 도쿄부립 제1중학 특별반. 지금 도쿄 히비야고교의 전신인데, 학적부가 남아 있지요. 3개월만에 퇴학하고 귀국. 2차 유학은 1906년. 와세다(조도전)대 고사부 지리역사과. 학생회에서 행한 모의국회사건(일본국회에 조선왕을 초청할 경우 조선왕의 지위문제)으로 자퇴. 귀국때 인쇄기구를 구입, 신문관 설립. 「소년」 발간.
(객):인쇄소를 갖춘 출판사를 18세소년이 운영했다니 놀랍군요.
(주):도쿄의 유명한 수영사의 시설(기사 1명까지 포함)을 구입한 것. 당시 현금 17만원. 구한말 조정의 현금예산의 배액에 가까운 돈이었던 것(「용헌잡기」 참조).
(객):육당의 부친이 관상감(지금의 기상청) 기사로 알려져 있는데, 거부였군요. 황력(중국에서 오는 달력) 독점출판권, 한약재상 등으로 모은 재산을 아들사업에 투자했다…. 그건 그렇고 언젠가 선생께서 「육당이란 누구인가」보다 「무엇인가」로 말해져야 한다고 했는데….
(주):그렇습니다. 문제는 신문관의 기능에 있습니다.
(객):신문관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국민국가라는 일종의 「상상의 공동체」를 창출하는 방법론이었다….
(주):지역 가문 계층 등으로 분리되었던 시절, 이를 국민국가라는 상상적인 공동체로 묶어내는 장치가 바로 출판이었던 것.
(객):선생께선 지금 국민주의(내셔널리즘)의 기원과 그 보급에 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근대소설이야말로 그런 몫을 해냈다는 것이 B.앤더슨의 논법 아닙니까(「상상의 공동체」, 1983). 가령 근대소설이 지닌 공간적 병치기법과 시간의 동시성의 제시야말로 상상적인 공동체로서의 국민을 경험케 했던 것이지요.
(주):인쇄술의 보급도 그런 몫을 훌륭히 해내지 않았을까. 위 악보를 잠깐 보십시오. 「경부철도노래」(신문관, 1908.3).
「해에게서 소년에게」보다 먼저 나온 것 아닙니까. 일본의 「철도가」에서 연유되었다고 하나, 그것은 별개의 문제. 노래체에서 아예 음악으로 된 안경의 도입입니다. 개화사상(지식)을 생리화하는 과정, 곧 육화하는 경우로 볼 것입니다.
(객):단순한 창가와 구별된다는 것. 기독교의 찬송가, 교가(가령 이화학당가 따위)와 다른 점은, 어떤 특정종교나 집단으로서의 공동체가 아니라 국민이라는 커다란 상상적 공동체를 육화하고자 했다는 것.
(주):맞습니다. 그 국민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란, 근대적 원근법이라는 좌표에서 비로소 성립된다는 것. 이른바 데카르트적인 세계인식의 틀. 다시 말해 공간적 균질성, 시간적 동시성의 전제 아래서 비로소 성립된다는 것.
(객):그러니까 「경부철도노래」에서 「세계일주가」(「청춘」창간호 부록, 1914.10)로 나아감이란 불을 보듯 훤한 이치이겠군요.
(주):압록강의 큰 무쇠다리를 건너, 흥안령 시베리아를 지나 모스크바, 그리고 마침내 파리에 들렀을 때의 정경 한 토막만 볼까요.
흰 비단을 너른듯한 세이누강은
즐김의 속살거림 무르녹은대
하늘을 꾀뚤려는 에펠탑은
파리저자왼통을 개미집보듯
샨젤리제큰거리 질번질번함
천하인물정화를 모아논게요
팔달로 한가운데 높은 개선문
국민의 대명예심 표상이로다
(객):바닷가에 섰던 소년이 드디어 세계 속으로 돌진해 가고 있다는 것, 그 세계는 80일만에 일주할 수 있다는 것, 균질적인 공간인식이라… 그렇다면 뭔가 빠진 것 같은데….
(주):전근대, 근대, 후근대가 각각 저마다의 다른 안경으로 세상보기라면 그 안경은 서로 등가인가. 아니면 어느 한 쪽이 보다 진보된 또는 보다 바람직한 것일까. 아니면 불가피한 변화의 일종일까 라는 문제.
(객):바로 그것. 니체와 그에 이어진 데리다까지의 주장들.
(주):본질적 문제제기이군요.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의 안경이 있을 수 있을 뿐이라면 이는 구제할 수 없는 상대주의에 떨어지겠지요. 그렇다고 인류사는 진보하는 것일까. 이성의 힘으로 세상은 바람직한 쪽으로, 좀 더 그럴싸한 안경을 창출해내는 것일까. 상대주의냐 절대주의냐 하는 난문에 부딪친 느낌이지요.
(객):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한 것 같군요. 당대인은 자기들의 안경이 제일 앞선 것이라 믿고 있다는 점. 그렇지 않으면 어찌 저토록 낙관적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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