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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 이순옥·최동철·최광혁씨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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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 이순옥·최동철·최광혁씨 일문일답

입력
1996.0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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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 상납 거절 6년간 감옥 생활”/김일성 교시로 외화벌이용 양귀비재배 성행/식량배급 몇달 끊겨 “폭동 일어날 것” 소문 무성/「당 간부 당당히,안전원 안전하게」 뇌물 챙겨/생지옥 정치범 수용소 11곳에 20여만명 추정지난달 귀순한 이순옥(49)·최동철(29)모자와 전북한군하사 최광혁씨(25)는 2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합동기자회견서 『북한은 간부들의 극심한 부패와 물자난에 시달리고 있으며 군사동계훈련을 대폭 강화했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시종 침착하게 회견에 임했으나 이씨는 감정이 격앙돼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다음은 귀순자들과의 회견내용.

―당간부의 뇌물상납요구를 거절해 옥살이를 했다는데 구체적인 귀순동기는.

(이)『85년 물자공급소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중국에 출장을 다녀온 뒤 당간부의 아들결혼식용 양복지를 달라는 요구를 거절해 미움을 샀다. 그일을 빌미로 「국가재산 탐오죄」누명을 쓰고 평남 개천교화소에 수감돼 6년2개월동안 온갖 고초를 겪었다. 풀려난 뒤 당에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오히려 재수감하겠다는 경고를 받고 배신감과 염증을 느꼈다』

―정치범이 수용되는 인민교화소 실상은.

『한 마디로 「땅위의 생지옥」이다. 20명 정원인 5m, 8m 크기 감방에 70∼80명이 수용돼 인간이하의 생활을 강요당했다. 영양실조와 구타등으로 수감자의 30∼40%는 불구자가 된다. 임산부는 무조건 사산시키는데 살아나는 태아는 즉시 목졸라 숨지게 하고 암매장한다. 수감자가 죽어도 가족에 통보하지 않고 골짜기에 버린다』

―고문도 당했다는데.

『87년 공개재판에 회부되기 전 거짓자백을 강요당하며 온갖 고문을 당했다. 화로에 사람을 집어 넣어 질식 직전에 꺼내거나 집단구타, 물고문, 채찍질등 끔찍한 고문을 수도 없이 당했다. 물을 강제로 마시게 한뒤 배를 밟아 물을 토하게 하기를 반복하는 고문이 가장 괴로웠다.(이씨는 아직 거동불편과 안면마비등 고문후유증을 겪고 있다)』

―당 간부에 대한 일반 주민의 인식은.

(이씨모자)『일반주민과 당간부 사이 빈부의 차가 워낙 극심한 데다 당 간부의 부패가 극에 달해, 표출되지 못할 뿐 주민들의 반감이 아주 심하다. 「당간부는 당당하게, 안전원은 안전하게, 보위부는 보이지 않게 뇌물을 먹는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정치범은 얼마나 되는가.

(최동철)『86년 당시 북한에는 함북도 경성군 11호 수용소등 11개 수용소가 있었다. 수용소마다 2만명가량 수용되니까 대략 20여만명으로 추정된다』

―북에서 외화벌이를 위해 아편이 얼마나 재배되며 어떻게 사용되는가.

『92년 김일성이 「도라지(양귀비)를 심어서 외화를 벌자」는 교시를 내린뒤 국가승인하에 많이 재배된다. 아편1㎏을 바치면 외화벌이계획에서 4,000달러를 감면해주는등 당에서 재배를 적극 권장한다. 전량 국가에서 거두는 아편은 일본 홍콩등으로 밀매된다. 외화가 없어 중국에서는 현물거래가 이뤄진다』

―북한의 식량난 실태는.

(최광혁)『95년 10월 노란 마대에 담긴 쌀이 군대에 들어온 것을 보았는데 남한에서 온 쌀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후방에는 배급이 몇 달째 끊기고 물건 가격이 치솟아 주민들은 이대로 몇달이 더 가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군대에는 1인당 1일주식보급규정량이 800인데 수송과정에서 간부들이 빼내 600여만이 배급될 뿐이다. 김정일생일등 큰명절이 아니면 고기는 구경도 못하고 담배대신 칡잎이나 배춧잎을 말아 피운다. 겨울에도 동복이 지급되지 않아 하복으로 겨울을 나는 군인도 있다』

―식량난에도 불구하고 군대에서는 훈련이 강화됐다는데.

『김정일의 명령으로 95년 12월부터 군사훈련이 대폭 강화됐다. 주야간 일과변경, 갱도적응훈련, 야간훈련등을 실시하고 있다. 군간부들이 「96년에는 무조건 전쟁한다」 「무력통일의 시기이다」등의 호전적인 발언을 자주 했다. 북한군인들은 핵무기·화학무기 기술이 남한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걸프전 이후 이라크가 통신케이블을 얕게 매설해 피해를 입었다며 전부대에서 케이블을 지하 1.5이상 깊게 매설하는 공사를 했다. 하전사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전쟁으로 세상을 바꿔보았으면」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최동철)『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남한사회가 많이 발전했다고 느낀다. 북한에 두고온 가족에 부끄럽지 않게 통일될 날까지 열심히 살겠다』<김성호·김경화기자>

◎귀순 3인 누구인가

◇이순옥씨(49·여)

47년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출생, 청진시 라홍기계공업학교를 졸업한 뒤 70년 4월부터 86년 10월까지 함북 온성군 상업관리소 간부물자공급소 책임자로 일하다 「국가재산 탐오죄」누명을 쓰고 87년 11월까지 함북 안전국 농포집결소, 구류장에 수감됐다. 이어 87년 11월부터 92년 12월까지 사회안전부 제1교화소인 평남 개천교화소에 수감됐다 출소, 94년 2월까지 온성군 4.25 담배농장 농장원으로 일했다. 남편 최정학씨(56·농장원)와의 사이에 함께 귀순한 외아들 동철씨(29)가 있다. 94년 동철씨와 북한을 탈출, 중국 조선족 집에서 도피생활을 하다 작년 12월13일 귀순했다.

◇최동철씨(29)

67년 함북 온성군에서 출생, 온성군 온성남자고등중학교를 졸업한 뒤 정치범수용소 경비대원으로 입소, 86년 6월까지 근무했고 같은달 김일성종합대학 자동화학부에 입학했다. 어머니 이씨의 교화소 수감으로 88년 4월 강제 퇴학당했다.

이후 88년 4월부터 94년 2월까지 4.25 담배농장 농장원으로 일했으며 부인과 1남1녀가 있으나 93년 5월 부인과 어머니 간의 갈등으로 가족과 별거해왔다.

◇최광혁씨(25)

71년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에서 태어나 재령군 동화고등중학교를 졸업한 뒤 사리원 지질대학 지질학과에 입학했으나 90년 9월 중퇴했다. 92년 8월까지 재령군 철제 일용품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92년 8월 군에 입대했다. 황해남도 재령군 행정위원회 지도원 출신인 아버지와 8명의 가족이 있다. 작년12월23일 휴전선을 넘어 귀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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