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양악:4/작곡(한국의 예맥)
알림

양악:4/작곡(한국의 예맥)

입력
1996.01.24 00:00
0 0

◎김인식·이상준이 「동음서기」 개척/김성태·김세형·나운영 등은 가지 무성/손자격 백병동·강석희 등 「하노버학파」 중진 활약지난해 4월14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95 안익태음악제」의 피날레장면. 민족의 수난과 영광을 묘사한 「한국환상곡」이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로 장엄하게 끝날 때 무대와 객석은 감동으로 가득찼다. 지휘자도 청중도 상기된 모습으로 민족의 대서사시 「한국환상곡」과 작곡자 안익태선생(1906∼1965)에게 감동과 자부심, 존경의 박수를 보냈다.

한국인은 예부터 아름다운 음악을 만드는 데 남다른 재능을 보여 왔다.

판소리와 민요등 다양한 모습으로 빚어낸 우리의 선율은 오늘날에도 민족의 가슴속에 깊이 스며 생동하고 있다.

서양음악이 이 땅에 전파된 후에도 마찬가지이다. 역사가 그린 여러 색깔의 한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재능을 갖춘 우리는 서양음악이라는 새로운 그릇으로 새 음악을 창조해 왔다.

최초의 예술가곡으로 기록되는 홍란파(작고)의 「봉선화」(1920년)로부터 조두남(〃)의 「선구자」, 김성태의 「한 송이 흰 백합화」, 김동진의 「가고파」, 이흥렬(작고)의 「바위고개」, 김순남(〃)의 「산유화」, 최영섭의 「그리운 금강산」, 김연준의 「청산에 살리라」, 윤용하(작고)의 「보리밭」, 장일남의 「비목」등 우리의 애창곡은 수없이 많다. 「반달」(윤극영·작고), 「새야새야 파랑새야」(김성태), 「오빠생각」(박태준·작고), 「꽃밭에서」(권길상)등 동요는 또 어떤가.

최초의 작곡가는 김인식(작고)과 이상준(〃)이었다. 이들은 초창기 서양음악을 이 땅에 전파한 「최초의 음악교사」들이었다. 이어 홍란파 현제명(작고) 하대응(〃) 채동선(〃) 김노현 구두회등 명실상부한 「1세대작곡가」들이 등장하면서 작곡분야가 뿌리 내리기 시작했다. 이중 김성태 김세형과 이들보다 조금 늦은 나운영(작고) 이상근등의 가계가 오늘날 일가를 이룬 1세대작곡가들로 꼽힌다.

작곡계의 대부로 통하는 김성태는 백병동 강석희의 스승인 정회갑과 이성재 김달성 윤해중 서경선등 수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백병동 강석희는 김정길 최인찬과 함께 지난해 타계한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을 사사하기도 한 중진들로 일명 「하노버학파」(독일 하노버음대에서 배웠다는 뜻)로 불리며 우리 음악계를 이끌고 있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김세형은 김순애를 비롯, 김용진 박중후 김정길등을 키워냈다. 또 나운영은 박재렬 나인용 이영자 이만방 이영조를 배출하는등 이들의 계보는 현재 우리 작곡계를 뒤덮을 만큼 무성하다.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중인 이상근은 임우상 우종억 최희주 최인식등을 배출했다.

신세대로는 임지선 구본우 허영한 조인선 김기범 박용실 홍수연 심근수 임주섭 진은숙등 많은 유망주가 배출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작곡분야는 질적 양적으로 크게 성장한 것이 사실이다.

아쉬운 점도 있다. 아름다운 가곡은 많지만 대중을 사로잡을 만한 교향곡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청중은 자신들을 감동시키는 우리 작품과 작곡가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지만 작곡가들은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일차적 책임은 작곡가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지난해 12월 이를 반성하는 큰 모임을 갖기도 했다. 해방이후 거의 처음으로 국내 작곡가들이 한 마음이 되어 개최한 「대한민국 작곡대제전」이 그것이다.

그러나 창작음악의 중요성은 알고 있지만 아끼고 육성하는데는 소홀한 우리 사회와 국민에게도 그 책임은 있다.

음악을 만들어도 발표할 무대가 없는 것이 우리 창작음악의 현주소이다.

한국의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출현을 원한다면 마음으로부터의 성원과 함께 제도적 지원책 마련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모든 음악가들의 지적이다.

◎세계적 작곡가 안익태와 윤이상/안익태­애국가 「한국환상곡」 대표작/윤이상­현대음악의 5대거장 칭송/모두 조국그리다 이역서 최후

안익태(1906∼1965)와 윤이상(1917∼1995)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우리나라 작곡가이다. 하지만 그들은 타국에서 조국을 그리다 숨진 비운의 음악가이기도 하다.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는 1930년대 중반부터 유럽에서 활동했다.

베를린 필, 런던 필, 불가리아국립교향악단등 명문 교향악단을 지휘하며 세계적 지휘자로도 각광받았던 그는 「한국환상곡」, 교향시 「논개」 「강천성악」, 가곡 「흰 백합화」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조국을 떠난지 25년만인 55년 귀국, 국립교향악단을 조직하는등 조국의 음악계를 위한 의욕을 펼쳤다. 그러나 국내 음악계와의 마찰 때문에 다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65년 스페인 마요르카에서 타계한후 77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최근 한국일보사와 안익태기념재단에 의해 그의 음악성과 민족혼이 다시 조명되고 있는 중이다.

세계 현대음악의 5대 거장으로 꼽혔던 윤이상은 동양적 현대음악의 개척자로 높이 평가받았다. 50년대 중반부터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활동하며 오페라「심청」, 교향시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등 150여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정치적 이유 때문에 조국을 찾지 못했다. 동베를린사건으로 67년 강제송환된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년여 옥고를 치렀다. 말년에 고향땅을 밟고 싶어 했지만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지난해 11월4일 독일 베를린에서 숨졌다.

음악인들은 『대중에게 낯선 윤이상의 업적을 본격연구하고 평가해 우리 음악사 안의 거장으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김철훈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