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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의 비극(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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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의 비극(사설)

입력
1996.0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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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바스티유였던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목격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마침내 지구적 평화가 도래했다고 기뻐했다. 자유민주주의의 명백한 승리로 인류를 갈등과 대립 그리고 전쟁으로 내몰았던 거창한 이념 사이의 대결이 종말을 고한 이상 진보를 위한 투쟁으로서의 역사도 끝이 났다고 선언한 이도 있었다.하지만 유혈참극으로 바뀌고 있는 체첸 사태를 보면서 우리는 이념대결의 종식이 결코 곧바로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념의 장벽이 사라진 바로 그 틈을 이제는 역사의 유물로만 알았던 인종주의와 제국주의 망령이 되채우면서 열국쟁패, 약육강식의 19세기적 상황이 재연되고 있다.

이번의 사태는 체첸반군이 러시아군의 체체니야 철수를 요구하기 위해 지난 9일 이웃한 다게스탄의 한 병원에서 3천명의 주민을 인질로 잡은 데 대해 옐친 러시아대통령이 무력진압을 강행한 데서 발단됐다. 하지만 참극의 뿌리는 러시아제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구의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인 체첸은 러시아의 침략과 폭정 그리고 스탈린의 숙청에 피로써 저항해 온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같은 체첸의 민족주의는 역사발전의 동력으로서 민족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공산정권의 「민족 평등화」 정책에 의해 호도되고 있었다.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소연방이 붕괴하자 1991년 체첸은 이 지역의 다른 많은 민족들처럼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체첸의 독립을 허용하면 이 지역의 다른 자치공화국들도 독립을 요구하는 도미노현상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다. 그런 경우 각종 천연자원이 풍부한 이 지역을 상실하는 것은 물론이고 흑해로의 진출로가 막힐 공산이 없지않다.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러시아는 적극적으로 독립저지에 나서 지난해 1월 무력침공을 단행했다.

탈냉전의 유포리아 속에서 우리는 모든 민족과 국가가 조화롭게 살아가는 지구공동체를 미래세계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장기적으로 볼 때는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국가의 논리」(raison detat)를 앞세운 제국주의가 강하게 남아 있을 것이라는 점을 체첸사태는 보여준다.

이렇게 본다면 러시아 이외의 지역에서도 제2, 제3의 체첸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제국주의의 망령 앞에서 체첸의 비운을 면하는 길은 강대국이 쉽사리 삼키지 못할 만큼 자위력을 기르는 것밖에 없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상실을 체첸의 독립보다 덜 아쉬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이가 있었다면 우크라이나는 체첸만큼 약소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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