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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강 서안 특파원보고:2(싹트는 평화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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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강 서안 특파원보고:2(싹트는 평화의 현장)

입력
1996.0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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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독립 꿈 거리에 넘실/평의회 선거앞두고 정치자유 만끽/팔·이군경 함께 근무하며 신뢰다져/유대인 정착촌처리는 아직 불씨로성서의 주요무대인 요르단강의 서안지역에는 지금 새로 자치권을 인정받은 팔레스타인인들의 꿈이 자라고 있다. 이곳은 67년 이른바 「6일 전쟁」으로 불리는 3차 중동전 당시 이스라엘에 점령된지 28년만에 토착민인 팔레스타인인의 손에 되돌아온 땅이다. 6개도시 400여개 마을에 달하는 서안지역내 아랍인거주지역들은 지난해 9월 시작된 2단계 자치협정에 따라 12월27일 라말라시를 끝으로 모두 팔레스타인측에 넘겨졌다. 베들레헴 인근 베잘라마을도 그 자치지역중 하나다.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빼기에 자리한 이스라엘군 본부에서 자치권을 인계받은 팔레스타인 경찰 20여명은 팔레스타인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주민대표들과 벅찬 해후했다.

치안총책인 카멜 알쉬 대령은 『앞으로 여러분을 보호하고 지키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48년 1차 중동전(이스라엘독립전쟁) 당시 예루살렘등에서 빠져나온 난민 신분으로, 혹은 요르단 국적을 지닌채 피점령민 신세로 지내온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최초의 민족적 정체성(national identity)이 결집되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선발대로 진주한 이 마을 출신 나수르 자비루 무하메드 중위(26)의 눈가에는 어느덧 이슬이 맺혀있었다. 그는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해 기자를 깜짝 놀라게 했다. 『18세 때 알제리로 건너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군에 들어간후 여러 곳을 떠돌며 독립을 위해 투쟁해 왔다』고 말문을 연 그는 『89년부터 3년간 북한의 모란봉학원에서 군사교육을 받아 한국말을 안다』고 털어 놓았다. 기자의 수첩에 한글로 또박또박 자신의 이름을 적어보인 그는 투박한 평안도 억양으로 『팔레스타인을 위해 한국이 힘껏 도와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나수르를 비롯한 팔레스타인경찰은 임무투입에 앞서 예리코시에 소재한 팔레스타인 경찰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과거 서로간에 총부리를 겨누던 적에서 치안책임을 공유하는 동지적 관계가 된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 경찰은 자치지역마다 지역협의기구(DCO)를 설치, 상호협의를 거쳐 치안을 유지하고 있다.

자치권을 새로 회복한 서안지역은 물론 가자지구 등 모든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의 최대 이슈는 20일로 예정된 자치평의회 선거이다.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수립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향해나갈 새로운 자치정부를 구성한다는 꿈에 가득 차있다. 그만큼 열기도 드높았다. 총 88석의 평의회 의석중 4석이 걸려있는 베들레헴 지역의 PLO사무실은 선거관계자들로 북적거렸다. 이미 여성 6명을 포함해 25명이 입후보, 경쟁률이 6대 1을 넘어섰다는 비정부기구(NGO)담당자 나피브 라이피씨의 귀띔이다. 2일부터 공식 선거운동에 들어간 각 후보자들의 공약도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 중단」으로부터 「잘사는 팔레스타인 건설」등 폭넓고 다양해 「해방」을 맞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분출하는 정치적 욕구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선거결과에 대해서는 대통령(국가평의회 의장)에 출마한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등 기존 자치기구를 이끄는 PLO측의 무난한 승리가 될 것이라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나블루스시에서 개업하고 있는 치과의사 주헤이어 사왈하씨는 『팔레스타인인들은 국제적 지지없이 독자적으로는 홀로 설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국제사회와 보조를 맞춰 자치과정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라파트 한사람뿐』이라고 나름대로의 선거관을 밝혔다. 파리대학출신의 지식인인 사왈하씨는 『팔레스타인의 장래는 정치적 문제보다는 경제적 자립여부에 달려있다』고 진단했다. 굶주림앞에는 해방의 기쁨도, 정치적 자유도 모두 한순간에 사라져 또 다른 좌절과 분노만이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서안지역에 평화가 굳건히 자리잡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헤브론으로 대표되는 유대인 정착촌문제는 5월부터 시작될 마지막 3단계 자치협상은 물론 이제까지의 모든 평화진전을 일시에 깨뜨릴 수 있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서안지역의 중심도시 헤브론은 반환문제를 둘러싼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 2단계 협정에서 예외적으로 3월말로 철군시한을 연기시켜 놓은 곳이다. 예루살렘 남쪽에서 40㎞ 떨어진 헤브론에 들어서면 금세 전쟁터에서와 같은 긴장감에 사로잡힌다. 시중심부 가까이에는 이스라엘국기를 둘러친 정착촌 키라트 아르바가 요새처럼 버티고 서있다. 이곳에 사는 450여명의 정착민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등 유대인의 직계조상 3대의 묘소를 지키는 일을 종교적 신념으로 삼고있다. 이들은 철수를 종용하는 정부와의 무력충돌도 불사하겠다고 밝혀 이스라엘 당국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서안지역내에는 67년 점령이후 건설된 크고 작은 정착촌 130여곳에 10만여명의 정착민이 살고있다. 「땅과 맞바꾸는 평화협상」에서 이들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앞으로의 평화진전에 중대관건중 하나다.

◎이­팔레스타인 관계/48년 「이」 독자건국 1차중동전 초래/미·소 냉전속 유대·아랍 적대심화

이스라엘―팔레스타인관계는 얽히고 설킨 중동문제를 푸는 화두이다. 48년 이스라엘의 탄생으로 시작된 팔레스타인 문제는 아랍민족주의의 기폭제가 되며 지금의 복잡한 구도를 빚어낸 씨줄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관계는 오래 됐다. 팔레스타인으로 불리던 현재의 지역내에서 때로는 다정한 이웃으로 때로는 철천지 원수로 부대끼며 살아왔다. 구약성경에서 불레셋(philistine), 아말렉족등으로 등장하는 이들이 팔레스타인인이다. 다윗과 싸웠던 거인 골리앗도 바로 팔레스타인인이다. 다같이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지만 아들인 이삭은 유대인, 그의 이복형인 이스마일은 팔레스타인인을 비롯한 아랍민족으로 갈라졌다는게 통설이다.

20세기 들어 갈등의 발단은 1917년 팔레스타인내 유대 국가창설(시온주의)을 인정한 밸푸어선언이다. 1차대전중 유럽내 유대인들의 협력을 얻기위해 영국이 약속했던 이 선언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원칙과 맞물리며 19세기말부터 일기 시작한 시온주의운동에 불을 당겼다. 그땅의 토착민 팔레스타인인과는 불화의 씨가 뿌려진 셈이다. 다음 「악수」는 47년 채택된 유엔 결의안 181조이다. 요르단강 서쪽(팔레스타인)을 분할, 유대·아랍 두국가를 창설한다는 이 안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등 아랍진영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의 독자적인 건국선언(48년 5월14일)은 1차 중동전(독립전쟁)으로 비화됐다. 49년초 휴전협정으로 15개월에 걸친 전쟁은 마무리됐으나 전장에서 탈출한 400여만 팔레스타인 난민문제는 신생국가 건설에 바쁜 아랍진영에 버거운 부담이자 정정불안의 요인이 됐다.

이에대한 반작용은 반서방, 반외세적 아랍민족주의의 부상으로 나타났다. 사실 미영등 서방측은 400여년에 걸친 터키 지배로부터 아랍세계를 구해낸 「해방자」였다. 그러나 이스라엘로 경사된 정책때문에 호감은 반감으로 뒤바뀌었다. 이후 미·소 양극체제를 거치며 대결 구도는 굳어졌다. 64년 태동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실지회복」투쟁은 테러리스트 활동으로 비쳐지고 73년까지 네차례 일어난 중동전은 강경 아랍국가들의 호전행위로 자리매김 됐다. 이가운데 이집트가 78년 캠프 데이비드조약으로 「이스라엘의 존재」를 첫 인정하며 평화 공존의 길을 터갔다. 그러나 불신의 냉전체제하에서는 완전한 화해모색은 불가능했다. 구소련붕괴에 이은 걸프전은 안정기조의 새로운 중동질서를 요구하게 됐으며 91년 마드리드 중동평화회담의 시작은 이에 대한 부응이었다.

◎요르단강 서안은 어떤 곳/충북의 ⅔크기… 3차중동전때 「이」 가 점령/120만 「팔」 인거주, 94년부터 자치지역 확대

요르단강 서안(West Bank)은 성서상 유대―사마리아 지역으로 불리는 곳이다. 우리나라 충청북도의 3분의 2정도 면적(5,706㎢)인 이 지역은 2차대전직후 이스라엘의 건국을 허용한 유엔 결의안 181조에 의해 아랍국가, 즉 팔레스타인국가의 영토로 배정됐던 땅이다. 하지만 아랍진영이 이를 거부한후 48년 1차 중동전의 혼란중 요르단이 장악했다. 그후 67년 3차 중동전(6일전쟁)때 이스라엘이 점령,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약 120여만명의 팔레스타인인이 거주하고 있다.

94년 5월 1단계자치협정에 따라 예리코시가 첫 자치지역이 된후 지난해 연말 자치지역이 대거 확대됐다. 올 5월부터 서안지역 전면반환등을 포함한 최종지위에 관한 3단계 협상이 순조로이 진행되면 이곳에 팔레스타인국가가 들어서게 된다.<요르단강 서안="윤석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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