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가 「붕괴의 해」였기 때문인지 신년에 거는 기대가 더욱 간절하고 애처롭기마저 하다. 대통령은 신년사를 통해 『정의와 법, 양심과 윤리가 지배하는 참다운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역사 바로세우기」에 나섰다』고 확인하고, 이 「역사바로세우기」는 제2의 건국을 향한 출발이라고 강조했다. 국회의장은 4월의 총선거가 깨끗한 선거풍토 속에서 치러지기를 희망했고 대법원장은 사법 제2세기를 맞아 공정한 재판으로 자유와 평등을 지키고 사법복지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헌법재판소장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존중되고 공권력이 헌법질서 내에서 행사될 때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된다고 지적했다.종교지도자들도 신년메시지를 내고 신문마다 특별사설을 싣고 있다. 모두 간절한 희망과 다짐을 담고 있으나, 맑은 정신으로 냉철히 읽어보면 기대와 희망의 밑바닥에는 불안과 우려가 깔려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느낀다. 무엇보다 4월총선 이후의 정국을 암울하게 진단하고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암담한 현실 속에서 무한한 가치들만 갈구하고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개혁이든 명예혁명이든 역사의 대변혁을 경험하면서 느끼는 상황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자화상은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져, 어떻게든 정상화하지 않으면 「추악한 한국인」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의 하나는 세계 어느 국민보다도 정치에 관심이 많고 모든 것이 정치적으로 되는 나라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정치적 성숙도가 높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4월선거에서 또 어떤 저질의 선거문화가 노정될지 걱정이 앞선다. 인물이 없는데 누구를 찍을까 당혹감마저 느낀다.
약 20년전, 그러니까 물론 통일되기 전의 서독에서 전국을 뒤흔든 기본가치(Grundwerte)논쟁을 목격한 일이 생각난다. 당시 낙태문제에서 발단하여 독일사회에 과연 전통적으로 신뢰해온 기본적 가치들이 작동하고 있는가, 만일 그것이 파괴되고 있다면 정부의 책임인가 교회의 책임인가 하는 문제로 연방총리와 헌법재판소장, 주교회의 의장까지 열띤 논쟁을 하는 것이었다. 결론은 다행히 아직도 인간의 존엄, 자유에의 권리, 연대성의 원칙, 평등과 사회정의, 공공복리의 원칙, 국가의 세계관적 중립등 기본가치들이 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해피엔드로 끝났다. 그에 관한 책들도 많이 출간되는 것을 보면서 역시 독일사회의 저력이 깊구나 싶었고 그것이 후일 독일통일로 연결되었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에는 국시논쟁이라 하여 「반공이 국시냐, 민주주의가 국시냐」로 국회의원이 구속된 예는 있었지만 여태까지도 우리 사회를 진실로 지배하고 있는 가치들이 무엇인가를 실감나게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우리에게는 헌법학에서 기본권(Grundrechte)이라는 말은 소개되었어도 기본가치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한 감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한국인으로 이 땅 위에 살면서 어떤 가치를 실제로 향유하고 있는가 새삼 궁금스러워진다.
솔직히 이것은 남북통일을 생각할 때 더욱 중요하고 심각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체제 속에서 막연히 자본주의의 혜택에 무감각하게 젖어 사는데, 서로 다른 체제와의 통일을 전제로 보면 근본적으로 새로운 확인과 모색이 불가피하다.
장기적으로 통일이 불투명해지니 우리 사회는 안으로 물고 뜯는 집안싸움이 격심해 지는 감이 없지 않다. 국내정치 우선으로 통일노력에 소홀하다면 정치인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가 삶의 전부는 아니고 문화의 자율영역이 신장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성숙한 국가이다. 정치를 하나의 직업과 사업이라 생각하고 뛰어드는 정치꾼들은 이번에 도태되어야 한다. 정치가 점차로 안정되려면 정치교육으로 정치인들이 먼저 성숙해야 한다.
새해가 되면서, 통일이 되기 전에 우리는 자체적으로 우리의 기본가치를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해줄 문민정부가 이미 후반기에 접어들고 있지만, 우리사회를 실제로 끌고 가는 기본가치들은 여전히 무엇인지, 헌법에 쓰인 자유민주주의라는 명분에만 도취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과연 어떻게 통일을 향해 추진해나가야 할지 진지하게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통일을 위해서는 먼저 사회적 갈등을 조정해서 자유와 평등의 가치통합을 이루는 일을 미리 연습해 두어야 한다. 정의를 앞세우며 과거청산을 통한 「역사 바로세우기」도 추진방법이 대통령과 익명의 소수자들에 의해 하향식으로 강행되어서는 아니되고 우리 사회의 기본가치와 연결하여 공론화와 국민적 공감 속에서 이루어져야 생동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서울대교수·법사상사>서울대교수·법사상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