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안을 한때 초긴장상태로/외교적 성과불구 국민지지 확보엔 실패
『리덩후이(이등휘)는 과거에는 친일파였고 지금은 분열주의자입니다』
베이징(북경)의 중국인들에게 이 타이완(대만)총통에 대한 평가를 내려달라고 했을 때 이구동성으로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지난 6월 이총통의 방미는 중·미·타이완 3국간에 극도의 긴장을 조성했다. 중국은 미국 정부가 「하나의 중국」원칙을 저버렸다고 맹비난하는 한편 타이완 인근 해역에서 수차례의 무력시위를 벌였다. 반년이 흐른 지금, 팽팽했던 양안간의 긴장은 다소 풀렸지만 내년 3월 타이완 첫 총통직선을 앞두고 중국인들의 「이총통 흔들기」는 간단없이 계속되고 있다.
「타이완의 타이완화」라는 이총통의 구상은 올해 영광과 좌절을 동시에 맛보았다. 72년 닉슨의 중국방문으로 시작된 미중 접근이후 타이완총통으로는 처음으로 미국방문을 실현한 것이 「영광」이라면 지난 2일 실시된 타이완 입법원(의회) 선거에서 집권 국민당의 퇴조를 막지 못한 것은 「좌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이 격하게 반응한 사실에서 보듯 이총통의 미국방문 실현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중국에 밀리기만 하던 타이완 외교의 값진 승리임은 누구도 부인못한다. 하지만 유권자들의 반응은 이총통에게 야속하게 나타났다. 그가 이끄는 국민당은 이번 총선에서 46%(92년 총선때는 53%)의 득표에 그쳐 민주화 추진이후의 퇴세를 반전하는데 실패했다. 반면 중국과의 관계개선및 통일을 강력히 요구한 신당은 3년전보다 3배나 많은 지지를 얻어냈다. 이총통의 외교적 승리가 빛을 바랬다는 차원을 넘어서 내년 총통선거에서 마이너스효과를 우려해야 할 참담한 결과였다.
이총통의 방미를 계기로 이총통이 집권이후 추진해온 「타이완 홀로서기」를 독립시도로 명확하게 규정하고 무력을 동원하면서까지 거세게 반발한 중국 당국의 전략이 타이완 주민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다.
올해 타이완 해협은 물론 태평양에 격랑을 몰고왔던 이총통은 1923년 타이완 북부 산지(삼지)향에서 태어났다. 타이완 인구의 89%를 차지하는 이른바 본성인인 것이다. 이총통은 국내 정치적으로는 국공내전 패배후 타이완으로 건너온 외성인 정치가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갖고 있다. 하지만 양안관계를 풀어나감에 있어서 그는 언젠가는 타이완 독립을 추구할 것이라는 중국정부의 이유있는 의심의 눈초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숙명적 「한계」도 지니고 있다.
중국 정부는 그를 「가통진독자」(겉으로는 통일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독립을 바라는 인사)로 공격하며 창씨개명, 공산당 전력등 그간 숨겨져 왔던 「과거」를 들추어 내어 그를 적잖게 괴롭히고 있다. 어쨌든 내년 3월 총통선거에서의 이총통 재선여부는 타이완인들의 독립 또는 통일 의지를 저울질하는 한 잣대가 될 것은 분명하다.<베이징=송대수 특파원>베이징=송대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